카다잔족

Kadazan people
카다잔
Penampang Sabah Kaamatan-Celebrations-2014-07.jpg
카아마탄 축전 중 전통의상을 입은 카다잔 남녀
모집단이 유의한 지역
말레이시아
(사바, 라부안)
언어들
카다잔, 사바 말레이어, 영어
종교
기독교(주요), 이슬람교, 애니미즘
관련 민족
카다잔두순, 두순, 오스트로네시아 민족

카다잔족(두순족의 일부)은 말레이시아의 사바 주에 토착한 민족이다. 주로 사바 서해안의 페남팡과 주변 지역, 내륙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정치 이니셔티브뿐 아니라 문화와 언어의 통합의 결과, 이들을 결합하기 위해 '카다잔-두순'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함께 사바에서 가장 큰 민족이다. 카다잔두순은 2004년부터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로부터 문서화된 유산으로 보르네오 토착국가로 인정받고 있다.[1]

'카다잔' 용어의 기원

군두싱 리차드 프랜시스 퉁골루에 의해 "카다잔"과 "두순"이라는 용어의 기원과 의미라는 제목의 광범위한 연구가 수행되었다. 기사는 카다잔 용어의 기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용어가 1950년대 이전부터 사용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증거가 있다고 믿는가? 보볼리안이나 보르네오의 보보히잔족은 '카다잔'이라는 용어의 참뜻을 더 잘 알기 위해 인터뷰를 했다. 보볼리안 오둔 바딘의 로투드 보볼리안에 따르면, '카다잔'이라는 용어는 '땅의 백성'을 의미한다. 페남팡의 보보히잔인 군도싱두시아무징은 카다잔과 비슷한 의미를 부여하며 이 용어는 항상 이 땅의 실존민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고 거듭 강조했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카다잔인들은 브루나이 술탄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카다잔이나 카다얀(로투드, 키마라강, 리완 등)은 술탄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오랑두순'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이는 말레이스어로 문자 그대로 '과수원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행정적으로는 카다잔인을 술탄국(또는 더 구체적으로 세금징수자)에 의해 '오랑두순'이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오랑두순'이 카다잔인이었다. 이 사실에 대한 설명은 1881년 사바에 있는 북보르네오 회사에 의해 만들어진 첫 번째 인구 조사에 의해 작성되었다. 오웬 러터는 1927년에 파파르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은 스스로를 카다잔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고 썼다. 행정적으로는 모든 카다잔인을 두순으로 분류했다. 1960년 KCA(Kadazan Cultural Association)의 설립을 통해서만 이 용어를 수정하고 'Kadazan'으로 대체하였다. 1963년 사바, 사라왁, 싱가포르, 말라야 등이 말레이시아 연방(Federation of Malaysia)을 결성했을 때, 행정적으로는 그 이후 태어난 모든 두순을 카다잔이라고 불렀다.

당초 1963년부터 1984년 사이 '오랑두순'의 정체성으로 '카다잔'에 대해서는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 1985년 KDCA(공식적으로 KCA라고 함)를 통해 카다잔과 '오랑두순'의 분열을 원하는 여러 당사자들의 많은 압박 끝에 두순이라는 용어가 다시 도입되었다. 이는 대체로 성공적이었고 집권 정당인 파르티 베르사투 사바(PBS). PBS는 KCA를 통해 '카다잔두순'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오랑두순'과 '카다잔'을 모두 대표했다. 오늘날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모두 이 민족을 카다잔두순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유전학

인류 유전학 연구 팀에 의해 대학 말레이시아 사바에서 Genome-wide SNP유전자형 데이터 연구에 따르면 밀접하게 대만 원주민들(아미, Atayal)과non–Austro-Melanesian은 필리핀의 인구보다는(비사얀 사람, 타갈로그어, 일로, Minanubu)과 관련된는 북부 Borneon 두슨 인(Sonsogon, Rungus, Lingkabau과 Murut)(2018년)[2].고르보르네오 섬의 그녀 지역

문화

말레이시아 사바페남팡(코타키나발루 인근)의 몬소피아드 문화마을에 모인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해골의 집'을 찾고 있다.

카다잔 문화는 쌀 농사의 영향을 많이 받아 다양한 가정 양조 발효 과정을 통해 준비된 다양한 진미와 알코올 음료가 절정에 이른다. 토오미스리누타우는 카다잔 인구 지역에서 제공되고 소비되는 주요 막걸리 변종이며, 카다잔 사교 모임과 의식의 주요 품목이다.

카다잔인들의 가장 중요한 축제는 카아마탄이나 수확 축제인데, 이곳에서 1년 동안 수확한 뒤 논의 정신이 영예로워진다. 이것은 5월에 일어나며, 이 달의 마지막 이틀은 사바 전역에 걸쳐 공휴일이다. 기념행사 중 가장 유명한 행사는 추수축제 미녀여왕인 운덕응가도의 크라우닝이다. 카다잔, 두순, 무루트 또는 룬구스 출신 젊은 여성들이 이 타이틀을 놓고 경쟁한다. 이 미인대회는 그녀의 지역사회를 위해 풍성한 수확을 대가로 그녀의 목숨을 바쳤다고 전해지는 유례가 없는 아름다움의 신화적인 인물인 후미노둔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다.

결혼에서는 신부의 가족에게 지참금을 지급하고 신랑과 신부의 가족 사이에 정교한 협상이 마련된다. 예절과 공손함의 전통적인 제스처로서 지참금은 은유적으로 평탄한 표면에 성냥개비를 세워 놓고, 각측 대표들이 지참의 흥정을 나타내기 위해 경계선을 넘어 막대기를 밀고 당긴다. 다우리는 전통적으로 물소, 돼지, 쌀자루 그리고 심지어 타파이의 항아리로 구성되었다. 현대적 지참금 협상에는 현금과 토지 소유 행위도 포함된다. 지참금에는 신부 가족이 지불해야 할 지참금 가격 이상의 추가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 페남팡 출신의 카다잔 여성과 케나우, 라나우, 투아란 지역의 두순 여성은 지참금이 가장 비싼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통적으로 카다잔인들은 마을이나 이웃 마을 내에서 결혼하는 것이 관습이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외국인 혐오증의 감소는 한 때 인종간 결혼과 관련된 어려움을 완화시켜 주었다. 압도적인 기독교의 영향력과 무슬림 배우자와의 일부 결혼으로 인해 이슬람으로 강제 개종하게 된 탓에 여전히 분노와 거부감을 유발하며 전통적인 카다잔인들을 치열하게 분열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은 최근 몇 년간 말레이시아의 소수민족이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점점 증가하는 소수민족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집권 말레이 정당들은 또한 공개적으로 이슬람으로의 개종에 동의하는 카다잔인들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 아닌 다른 카다잔인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부여해 왔다. 말레이시아의 맥락에서 이슬람으로의 전환은 또한 말레이 민족에 대한 법률에 의한 자동적인 변환을 초래한다. 그 결과 인구통계학적 변화는 최근 몇 년 동안 카다잔-두순 공동체의 감소하는 숫자를 더욱 더 복잡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그 유산을 보존하려는 노력에 있어 더욱 도전하게 만들었다. (이름?)

요리.

샌드위치 빵과 함께 제공되는 황새치 히나바. 히나바카다잔두순 요리의 일부분이다.

전통적인 카다잔 요리는 대부분 기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끓이거나 굽는 것을 포함하며, 특히 죽순, 사고, 민물고기와 같은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의 특정한 사용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 독특한 변형과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간장과 고추가루를 입힌 익지 않은 망고의 간단한 에피타이저부터 누솜으로 통칭되는 다양한 절인 음식까지, 소싱제나 발효기술에서 나오는 톡 쏘고 톡 쏘는 맛과 톡 쏘는 맛이 전통 카다잔 요리의 핵심 특징이다. 가장 잘 알려진 카다잔 요리 중 하나는 히나바인데, 이는 남미 세비체(ceviche)와 개념이 비슷하다.

감귤즙, 생강, 양파 등 원재료와 쓴 박, 말린 밤방아씨 등을 넣고 볶아 만든 샐러드로 코코넛 가닥과 식감이 비슷하다. 이 요리는 때때로 전통적인 카다잔 메뉴가 없는 특정한 사바한 레스토랑에서 제공된다.

또 다른 인기 있는 요리는 피나사칸으로 밤방간(보르네오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망고)이나 타코밥(아주 타르트 말린 과일)으로 요리된 바다나 민물고기(보통 더 작은 종)로 구성되어 있다. 밤방산 과일은 식사와 함께 먹기도 한다. 그것은 녹솜처럼 절이고 갈은 밤방간 씨앗으로 장식되는 경우가 많다. 투하우(Tuhau)는 향긋한 지역 뿌리로서 샐러드로 자주 만들어지거나 식초를 녹섬으로 하여 보존된다.

멧돼지와 바카들은 숯불구이, 찌개, 누빔으로 만들어졌든 간에, 카다잔두순 공동체에서 매우 인기가 있는데, 이는 종종 결혼식이나 주요 모임에서 필수적인 품목이다. 단것에는 바나나 잎에 찐 끈적끈적한 떡의 일종인 히놈푸카(Hinompuka)가 있다. 카다잔 사람들은 또한 찹쌀과 천연 효모에서 우러나온 달콤한 맛의 포도주인 리잉으로도 유명하다.

현대 카다잔 음식은 국제적 유행은 물론 중국과 말레이 음식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전통 재료의 사용이 새롭고 참신한 방식으로 해석되는 것을 자주 본다. 예를 들어, 밤방간은 아이스크림 맛과 치킨 리잉 수프 또는 슈퍼 마누크 난삭 미암페이 리잉은 중국과 카다잔 지역사회에서 모두 인기가 있다. 리잉은 양념장에서도 사용되며, 삼발의 국소적인 변종이 맛있고 심지어 볶은 면의 향미로도 사용된다.

음악과 춤

카다잔인들은 또한 그들만의 독특한 춤과 음악을 개발했다. 스마자는 남녀가 춤추는 명칭으로 부부뿐만 아니라 부부들이 함께 추는 것으로, 보통 개별적으로는 타궁이라 불리는 수공예 청동 징의 교향곡이 곁들여진다. 옷띠의 의식용 고리는 남성과 여성 모두 착용한다. 스마자와 징 반주는 일반적으로 즐거운 의식과 행사 중에 행해지는데, 그 중 가장 흔한 것이 결혼 피로연이다. 솜포톤은 또 다른 악기다.

2010년 말레이시아 세팡가르에 도착하자마자 말레이시아의 전통적인 카다잔 춤을 어떻게 추는지 미국 7함대 지휘함 USS 블루리지(LCC 19)에 배정된 선원들을 가르치는 말레이시아 댄서들.

카다잔은 다양한 종류의 타궁 앙상블 - 큰 교수형, 매달리거나 매달리거나 잡는 앙상블, 두목형/노반형 으로 구성되는 음악적 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또한 수평형 멜로디 악기를 가진 쿨린탕앙상블 - 앙상블을 사용한다.[3][4]

kg 출신 고 보보히잔 비안티 무우징 여사. 칸다존과 kg 출신의 보보히잔 빈줄린 시가윤. 헝가브는 전성기 때 타궁이나 징의 진화와 박자 리듬에 대해 상담을 받았다. 최근에는 전통문화와 풍습의 권위자였던 오케이 다투 진톨 모건팅 전 페남팡 구청장도 자문을 받아 수세기 동안 사용되어 온 전설에 대해서도 비슷한 내레이션을 들려주었다.

원래 밤바아존에서 후미노둔이 부활한 후, 당시 그들이 알려졌던 누누크 라강 공동체의 생활양식이 풍부하게 공급되면서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설은 후미노둔의 영혼이 보보히잔의 제술, 제례와 의례, 금기, 징 구타, 수마자우춤 등의 전통문화 등을 가르치면서 보보히잔의 창시자를 세웠다고 전한다. 누누크 라강 문명 시대에 보보히잔인들은 대나무들을 다양한 길이와 모양, 크기로 만들어 일곱 개의 악기로 이루어진 합주곡으로 배열했는데, 일곱 번째 항목은 오늘날 우리가 통궁곤, 통궁구, 통궁각으로 알고 있는 북(간당)이다. 그 후 보보히잔족은 오늘날 마가궁, 보티바, 둔사로 알려진 타궁의 박자 리듬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실로폰과 비슷한 또 다른 악기인 쿨린탕간마가궁의 반주로 연주될 것이다.

18세기 후반 브루나이 상인들은 북보르네오에 놋쇠 통조림과 놋쇠 통조림을 도입하였다. 카다잔인들은 우아하고 징 소리가 멜로디하게 들린다고 느끼면서 이 새로운 놋쇠 물건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대나무 징을 대체하기 위해 7개의 악기로 구성된 전형적인 앙상블에 가족 가보와 징이 배치되면서 이러한 놋쇠 시대의 수집품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 징 박자와 리듬이 개선되어 다양한 용도가 가능해졌다. 어떤 의식에도 동행할 수 있는 징 박자는 대개 단조롭다.

결혼식, 축제 행사, 고관들을 맞이하는 환영 인사 등에 대해서는 징 박자의 리듬이 흥겹고 멜로디하며 생동감 있고 매끄럽다. 때때로 보티바 징 비트는 변형으로 행해진다. 장례식에서 둔사이 징박은 죽은 사람에 대한 존경의 상징으로서 매우 엄숙하고 무시무시하다. 짧은 간격을 두고 홀로 꽹과리를 치는 한 박자는 정글에서 길을 잃거나 물에 빠진 실종자와 같은 비상사태에 대한 신호로 쓰였다. 그러나 타궁을 이기는 기술을 알고 있는 카다잔인은 몇 명 안 된다. 경험을 쌓으려면 한 번의 긴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오늘날의 카다잔 젊은이들이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기술을 습득할 마음이 없다는 것은 문제였다. 따라서 마가궁 경연대회와 스마자우 경연대회는 카아마탄 축전뿐만 아니라 카다잔 음악과 춤의 문화를 보존하고 홍보하기 위해 마을 단위로 조직된다. 결국 스마자우 대회는 안무에 따라, 마가궁은 징 비트, 리듬, 템포에 따라 평가되는 지구 수준에서 대회가 열린다.

1900년대 초, 이 금관악기들은 가치 있는 물건이었고, 가부의 상징이 되었다. 한때는 결혼 지참금으로 수요가 많았다. 결혼하지 않은 가족들은 지참금 요건을 충족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결혼식 전에 이 물건들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풍습은 여전히 일부 지역에서 만연하고 있다. 특히 지참금의 대부분을 현금으로 바꾸는 구가 많다. 악덕이나 통조림, 놋그릇, 특히 징에 대해서는 값을 매길 수 없고 희귀한 상품이 되었다. 일반적인 징 세트는 약 1만 RM,000원, 고품질의 사운드를 가진 최고의 세트는 약 15,000 RM이 될 것이다. 원래 징은 일반적으로 놋쇠로 알려져 있지만 완전히 놋쇠는 아니다. 그것들은 사실 매끄럽고 반향적이며 실로포닉한 음색을 내기 위해 철, 황동, 구리로 구성된 복합체로 만들어졌다. 전적으로 놋쇠로 만든 공은 생산되는 소리가 편평한 공명을 가지기 때문에 인기가 없다.

쿨린탕안 또는 미니어처 징은 9개의 앙상블로 구성되며, 선호도에 따라 징과 동시에 연주하여 징 음악을 향상시킬 수 있다. 최신형의 징은 전체적으로 납작한 철판으로 만들어졌는데, 쿠다트에서 생산되었다. 이것들은 보통 주말 시장이나 페남팡 동공온의 타무에서 구할 수 있는데, 각 세트는 RM700에서 RM1,500 사이의 비용이 든다. 이 징의 음질은 심벌즈가 부딪치는 것과 새우에 가깝다. 최고의 멜로디 징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페남팡의 카다잔 두순문화협회(KDCA) 홍코드에서 열리는 카아마탄 추수축제 기간인 5월 30일부터 31일까지 마가궁과 스마자우 대회에 들를 수 있다.

종교

카다자인의 대다수는 기독교인으로 주로 로마 가톨릭[5] 신자와 일부 개신교 신자가 주를 이룬다.[6] 이슬람은 또한 증가하는 소수자에 의해 실천되고 있다.[7][8][9] 기독교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전에는 일부 학자들이 애니미즘을 동일시하는 모모리아니즘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애니미즘

1921년 카다잔 신부님

애니미즘은 1880년대 영국 북보르네오 정부 시절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지배적인 종교였다. 개신교의 영향력은 20세기 후반 영국의 영향 때문이다. 고대 카다잔-두센인에 대한 '종교'는 없었고 그들에게는 그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일종의 관계일 뿐이었다.

카다잔의 신앙 체계는 키노로힝간이라는 하나의 만능 신에 중심을 두고 있다. 쌀 재배는 가다잔 생활의 중심이며, 이와 같이 다양한 제례와 축제를 기념하고 논 경작을 중심으로 한다. 카다마탄카다잔두순에서 유래된 축제 중 가장 인정받는 축제다. 이 연례 축제는 본질적으로 감사하는 의식이며, 옛날에는 또한 쌀의 정신인 밤바아손을 달래는 역할을 한다. 특별한 의식은 부족 사제나 보보히잔이라고 알려진 정신 매개체에 의해 각각의 수확 전후에 행해진다.

게다가, 카다잔-두순족의 대다수는 그들의 조상들의 영혼들이 키나발루 산의 꼭대기에 산다고 믿는다. 카다잔인들은 이 산을 조상을 뜻하는 '아키'와 '커핀'을 뜻하는 나발루(또는 나바후) 두 단어로 이루어진 '아키나발루'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키나발루는 '죽은 자의 모방'을 의미한다. 보보히잔은 매년 산의 안내 정신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낸다. 그러한 의식을 행하는 목적은 키나발루 산의 정신은 물론 조상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함이다. 종교의식은 등반 중 영신의 재가를 구하고 보호를 요청하는 수단으로 이해된다.[10]

의식적 고립으로서의 카다잔 공동체는 정신세계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여기에는 카다잔인과 정신세계 사이에 균형 잡힌 의식국가를 만들기 위한 여러 제사가 수반된다. 카다잔인들은 전능하신 창조주(미나망군), 살아 있는 사람의 영(코두두보), 죽은 사람의 귀신 영(토비보), 악령(오곤) 등 4대 영을 믿는다.

보보히잔의 의의

누군가의 장기적이거나 심각한 병을 치료하기 위해 보보히잔에게 도움을 청할 때, 신부님은 보통 부르심을 받는다. 보보히잔은 그녀가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는 데 좋은 배경을 제공할 최신 정보를 제공받을 것이다.

보보히잔은 또한 수스쿠온이나 선한 영혼 컨설턴트와 사전 상담을 할 수 있다. 보보히잔이 다음날 병자의 집에 가기 전에, 그녀는 먼저 전날 밤 그녀의 수스쿠온과 상의하여 가능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하며, 그녀가 치유식에서 접근할 수 있는 올바른 제물을 결정해야 했다. 그러면 그녀는 닭, 돼지, 심지어 버팔로가 제물로 필요한지 여부를 알게 될 것이다. 어떤 때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간단한 기도나 기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보보히잔이 병의 원인에 따라 선택해야 하는 여러 가지 미움이나 기도가 있다. 기본은 포포온통이나 스스무쿠가 좋은 정신 컨설턴트들과 연락하여 추가적인 지도를 받는 것이다.

그 Bobohizan 있다 기도의 또는 다른 다음 형식, 그 아픈 사람의strayed 정신을 말한다. 그리고 이 귀가를 준비하고, 제물과 사람의 병의 원인이 되는 악령들을 달래거나, 악한 영으로 가능한 대화의 무아지경에 있는 것 Rundukon[11]의 무대에 찾고 가셔도 됩니다.whi사제는 악령의 의도를 알기 위해 의사소통하는 신탁이 된다. 그것은 거의 24시간 동안 지속될 수 있는 보보히잔의 가장 긴 공연이다.

또 악령에 의해 사람의 몸 속으로 유도된 '파편들을 청소하고, 흑마법의 영향으로부터 사람을 치료하며, 병든 사람을 죽은 사람의 손아귀나 소란으로부터 해방시켜 달라는 기도문을 읽을 수 있다. 보보히잔에게 하루, 때로는 사흘 동안 치료를 받고 나면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

밤바아존의 영예

마을 사제는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논줄기를 조심스레 골라 수확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묶는다. 이 줄기들은 밭에 남겨져 있으며, 수확이 완료될 때까지 베거나 개조해서는 안 된다. 선택된 논줄기는 밤바아존인 논정신을 상징한다. 이 줄기는 수확이 끝나자마자 제사장이 베어서 밭주인의 집으로 가져간다. 영혼은 집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마가보는 파디가 윈노우(winnow)되어 헛간에 저장될 때 일어날 것이다.

마가바우 의식

마가바우 의식은 해가 진 직후부터 시작된다. 신부와 수행원들은 거실 바닥에 앉아 밤바아존에게 고대 기도를 외치기 시작한다. 이것은 밤까지 계속된다. 이후 신부님과 수행원들이 일어나 거실을 천천히 돌면서 구호를 외친다. 잠시 후, 그들은 밤바아존에게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 남자들이 원 안에 들어가 사제, 수행원들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은 바닥에 발을 동동 구르고 규칙적으로 카다잔인들의 의기양양한 외침인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팡키스"를 내뱉는다. 이 의식은 전날 저녁 밤바아존과 타파이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타파이와 비슷한 재료로 밤바아존에 발효쌀(하봇)을 먹일 준비를 하는 날이 밝는 새벽까지 이어진다. 그 의식은 감사의 표시로 즐겁게 만드는 것으로 끝난다. 밤바아존은 집에 머물며 다음 모노깃이라고 알려진 또 다른 모노깃이 논으로 '그녀'를 데려가는 의식을 치를 때까지 헛간에서 논을 지키고 있다.

여기 기도나 주문의 예가 있다.

Odoi kada' kati gangang arai kotunguan ko do pa'is  otimbaar ko do sadap odoi kososodop zou do mogiginipi kosou ku do nokotimung kito  do pamakanan do karamaian diti Nga ino noh maan zou  do mamagavau do paai diti do ounsikou nodi kaka do Bambaazon do kosuni vagu do to'un tiso  do ka'anu no vagu kotimung kito om ogumu' nodi do pamakanan tokou mantad d do paai 

역사적 신념

오늘날 카다잔인들의 조상들은 대만에서 이주한 사람들 중에 있었다. 이들은 대만 원주민(포모산족)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후 수천 년에서 기원전 1500년까지,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셀레베스, 몰루카, 북부 보르네오, 동부 자바까지 필리핀을 통해 남쪽으로 퍼져나갔다. 한 지부는 기원전 1600년경 할마헤라의 몰루칸 섬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부 멜라네시아(기원전 1200년)와 미크로네시아(기원전 500년)를 식민지로 삼았다. AD 0년까지는 폴리네시아로, 500년까지는 하와이와 이스터 섬으로 이주가 계속되었다.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마침내 1300년 경에 지구상의 마지막 무인도인 뉴질랜드에 도달했다."[12]

카다잔인의 조상이 윈난에서 왔다는 반신반의도 있다. 여기에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면 이들이 먼저 대만으로 이주했다가 나중에 남쪽으로 내려갔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1958년 현재의 사라왁에서 탐과 바바라 하리송의 호모 사피엔의 3만7000년 된 '딥 스컬'이 바램의 니야 동굴에서 발견되면서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인간 이주에 대한 '보르네오 아웃 오브 스컬' 이론을 제안하게 되었다.

누누크 라강 시대

선사시대의 카다잔은 누누크 라강 나무가 존재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대략 오늘날까지 탐피아스에 위치하며, 라나우탐부난의 동쪽에 두 강(리와구와 겔리방)이 만나는 곳이다. 누누크는 반얀 나무를 뜻하는 두순어다. 라강 역시 붉은색을 뜻하는 두순어 '아라강'에서 유래했다. 누누크는 매우 발달된 버팀목 줄기를 가진 거대한 망그로브 나무처럼 생겼고, 깊은 개입을 통해 좋은 자연 쉼터를 제공한다. 나이든 사람들 위두 탐부난이 말한 누누크 라강 또는 '붉은 반얀 나무'는 둘레에 여섯 개의 뻗은 팔을 재었다. 캐노피 꼭대기는 가로 12피트, 세로 20피트의 오두막집인 카다잔-두순 오두막과 합류한 7개의 오두막 아래에서 은신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13] 그곳의 수많은 가지와 거대한 두꺼운 잎은 지역 신앙에 따라 야생 생물, 새, 곤충, 그리고 심지어 영혼의 이상적인 거주지와 서식지를 제공했다. 거대한 나무의 뿌리가 약효가 뛰어난 붉은 라텍스를 생산한다고 믿어졌다. 사실 누누크의 라텍스는 현대에 와서도 발진과 다른 경미한 피부질환을 치료하는 데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누누크 라강 미노릿 푸쉬로 인한 누누크 라강 지역에서의 피난은 보보히잔과 백성들의 만남을 통해 결정되었다.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즉시 누누크 라강을 떠나는 동안, 타가하스 사람들이 후방 경비대 역할을 맡기로 합의했었다. 강 지류는 이주하는 방향으로의 주요 지도가 되었다. 각 집단의 이주 방향은 리와구 강의 흐름에 의해 안내된다. 보보히잔은 카다잔-두산족이 누누크 라강에서 이동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다잔과 룬구스는 누누크 라강에서 라부크 강을 거쳐 이주했다. 카다잔과 룬구스 일행은 이후 마라크-파락 계곡을 거쳐 코타베루드의 템파스크에 도착했다. 여기가 그들이 분단 결정을 내린 곳인데, 한 무리는 마퉁공, 쿠다트, 그리고 다른 무리는 특히 페남팡과 파파르로 향하게 될 것이다. 당초 카다잔인들의 정착지는 맹그로브("탕가르탕가르")가 많이 자란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은 오늘날의 벨루란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들을 탕가라 또는 탕가라 한다. 룽구스에 대해서는, 룽구스가 어떻게 그들의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백사("pirungusan")가 존재한다고 묘사된 지역에 도달했다.

카다잔과 룬구스는 언어의 유사점을 공유하는데, 아마도 누누크 라강에서의 긴밀한 관계 때문일 것이다.[14][circular reference]그들이 서해안에 정착하면서 카다잔인들은 브루나이인들과 다른 정착민들을 만났다. 물물교환 무역은 카다잔인들이 브루나이인들로부터 징, 구리와 은제품, 목걸이, 뱅글을 가지고 있는 데서 일어났다.

P.S 심씨의 이론

P.S.에 따르면 심씨가 2007년 펴낸 책 '사바 인랜드 피플: 이전, 누누크 라강 중, 후'에는 카다잔두소의 조상이 1200년부터 사라왁 주 바람에서 왔다고 적혀 있다.

P.S 심씨는 1220년경 파파르 키마니스 평야에 카다잔 부족이 정착했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을 타타나 부족이라고 밝힌 또 다른 집단은 쿠알라 펜유 분두에 정착했다. 그 후, 1800년대에 수많은 카다잔인들이 파파르에서 푸타탄-펜암팡으로 이주했다. 구체적으로, 첫 번째 그룹은 탕가 그룹이었다. 두 번째 그룹에는 '방카아콘'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 후 그 이름이 이어졌다.

푸타탄의 톰보보 어딘가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탕가와 방카아콘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 이 논쟁은 방카아콘 일행이 철수해야 할 정도로 파급력이 컸고, 결과적으로 오늘날 이남의 미네토드로 알려진 지역에 정착했다.[15]

룽구스 민화의 카다잔

대대로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이른바 모모군 룽구스는 여러 가지 기술이 있어 형제들에게 박해를 받은 사람이 세운 것이다. 그는 그 당시 자신의 공동체를 보호할 수 있는 동물 덫과 무기를 만드는 데 능숙했다. 실력 때문에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충실한 아내와 백성들을 바다로 추방함으로써 벌을 받게 되었다.

그들이 탑승한 배들은 보르네오 섬에 발이 묶여서 종교적인 목적으로 팜팡 나발루로 향했다. 그는 자신을 '우산-우산'이라고 불렀는데, 친형제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어 가족이 없었다.

그들은 그곳에 있는 동안 루마그 나발루를 숭배한 데 이어 종교적 영령으로 부활했다. 종교의식은 점점 더 붐비면서 진화를 거듭했다. 우산우산의 풍속을 계승한 법학에 능통한 종교인은 아키 보볼리잔 곰부론이었다. 군중이 늘어나면서 우산우산 규율에 따라 사회의 법이 관보에 게재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아키 보볼리잔 곰부론은 누군가 간음하면 큰 돌멩이 옆에 덫이나 '다이어퍼'에 넣어 물에 빠져 죽는다는 가장 엄격한 '곰부론 법'을 시행했다. 돌은 반드시 범인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고의로 (누군가 혹은 그 어떤 것을) 살해했다면, 그 사람도 처벌받을 것이다.

이러한 규칙은 아키 보볼리잔 구라무누크(Aki Bobolizan Guraumanuk)가 루마그 나발루(Lumaag Nabalu)로부터 곰부론 법령을 폐지하라는 계시를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계시에 따르면, 어떤 죄도 "망가라하"(포크 도살)라고 일컬어지는 살육으로 보상하거나 지불할 수 있다. 생명을 도살하여 갚을 수 있는 모든 죄는 가축의 희생을 통해 갚아야 한다. 이 일은 '키노링안에게 용서를 구걸하는 죄와 중생의 지불자'라는 뜻의 '보볼리잔'이 대충 한 것이다. '보볼리잔'의 의미는 룬구스어인 '볼리지'에서 따온 말로 '구입한다'는 뜻이다. 키노링안에게 축복을 받거나 용서를 구하는 데 이용된 돼지는 '보곡/워곡'("돼지")이라고 할 수 없지만, '볼지'라고 불러야 한다. '벌지'는 죄의 구원을 거쳐 가해자가 새로운 정신을 얻을 수 있도록 희생하는 동물의 역할을 말한다.

그 후, 모모군 인구는 아키 누누크 라강 시대에 점점 더 늘어났다. 아키 누누크 라강은 라부스 종교(동물주의)의 가르침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잘 알려진 보볼리잔이었다. 아키 누누크 라강이 세상을 떠나기 전, 아키 보볼리잔 구라우마누크는 루마그 나발루로부터 전갈을 받았다. 이 메시지는 루마그 나발루가 키나발루 산에서 바다로 흐르는 모든 강이 모모군 소유라고 했기 때문에 아키누크 라강의 세 아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하는 새로운 규칙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모군 손자나 후손들은 그들이 정착할 어떤 지역에서든 높은 곳, 언덕 또는 가장 높은 산을 선택해야 한다. 가장 높은 언덕에서 바다로 흘러간 강물은 모두 모무리나아이트(모모군을 지킨 주령 7명의 이름을 담음)라는 의식을 통해 초대함으로써 루마그 나발루의 영령이 지키는 곳이었다.

보볼리잔 구라우마누크의 가르침은 아키 누누크 라강에 의해 발전되었다. 아키 보볼리잔 구라우마누크의 유언은 모두 아키 누누크 라강이 선포한 것이다. 아키 누누크 라강의 세 아들은 아키 룽수드(룽구스 족의 어시스트), 아키 룽수바이(카다잔 족의 어시스트), 아키 투룸푸크(모든 두순 족의 어시스트)이다.

아키 누누크 라강은 미존바이그의 침입으로 방해를 받지 않도록 아들 아키 룽수드(장자)와 아키 롱수바이(차남)를 폼팟 타나(쿠다트, 코타 마루두, 피타스)를 정복하여 해안으로 보냈다. 그들이 런덕온(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루마그 승인)을 통해 받은 메시지에 따르면 만남의 지역인 라하트 코토놉원(서쪽 바다)과 라하트 코실자혼(동쪽 바다)이 외부인(해적)의 침입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키 누누크 라강은 백성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해안 일대를 통째로 장악하기로 했다. 따라서 해안의 치안을 책임진 사람은 아키 룽수드와 아키 룽수바이였다.

막내아들인 아키 투룸복은 아키 투룸복이 아버지의 집을 물려받은 단돈 통코브(상속하는 아버지의 집)로 여겨졌다. 탄돈통코브는 오늘날 룬구스족의 풍습 속에 여전히 존재한다. "탄돈통코브"는 "방에 남아 있는 내용물 또는 점유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아키 투룸복은 kg의 후계자였다. 누누크 라강은 그곳에서 지도자가 되었다.

곧 아키 누누크 라강은 죽어서 깊은 호수 근처에 묻혔다. 이 호수는 현재 산다칸 루부크 스구트 지역의 캄풍 탐피아스라고 불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전설에 따르면, 40일 후에 아키 누누크 라강이 묻혔는데, 의식 '몽구푸스'가 있던 날, 아키 누누크 라갱의 무덤 한가운데에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무화과나무는 빨갛고 잎이 긁히면 사람의 피를 내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뭇 달랐다. 그러자 아키 누누크 라강 사람들은 그 나무가 아키 누누크 라강의 화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나무를 숭배하고 누누크 라강이라고 이름 붙였다.

아키 룽수드는 겨우 폼팟 타나를 정복했고 그 후손들은 모모군 룽구스라고 불렸다. 한편, 아키 롱수바이는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는 아내가 중태에 빠져 있다가 나중에 아키 룽수드를 따라갈 것이기 때문에 누누크 라강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아키 룽수드의 여정은 표시로 쿠쿠룽안(닭장)으로 표기될 것이다. 아키 룽수드가 지나갔을 언덕 꼭대기마다 보르네오, 루마그, 그리고 그들이 지나온 영토에 대한 권력 선언으로서 보르네오의 경비정신을 부르기 위해 닭을 제물로 바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아키 롱유바이(Aki Longuvai)가 형의 경로를 추적하고 있을 때 방향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모두 한 경로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두 경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키 룽수드가 여행의 길 내내 표시한 쿠쿠룽안은 불행하게도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에 의해 잘못된 위치로 옮겨져 있었다. 그 결과 아키롱수드는 핀암팡(Pinampang) 또는 페남팡(Penampang) 지역에 도달할 때까지의 행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길을 잃었다("피남팡"은 아마도 "큰 바위"라는 의미의 카다잔/룽구스 단어 "pampang"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그들은 식량이 부족해서 그곳에 언덕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한참이 지나도 그들은 폼팟 타나에 오지 않았다. 아키 룽수드는 결국 루마그를 통해 아키 롱수바이가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키 룽수드는 부하들에게 아키 롱수바이(Aki Longuvai)를 찾으라고 지시했고 다행히 피남팡에서 아키 롱수바이(Aki Longuvai)를 발견했다. 아키 룽수드의 하인들은 아키 룽수바이에게 폼팟 타나에서의 선교에 동참하도록 초청했지만 아키 룽수바이는 초대를 거절했다. 아키 룽수바이는 전쟁 속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곳에서 비상사태를 맞이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아키누크 라강 코도리(후기) 아키 룽부바이는 누누크 라강에서 나온 뒤 태어난 장남 아키 불운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아키 불룬은 아무도 없이 17세 때 폼팟 타나에 왔다. 하지만 아키 불룬은 호랑이를 이길 수 있다고 알려진 7마리의 특별하거나 높은 면역력을 가진 개들을 동반했다.

폼팟 타나를 특정 지역으로 나누는 세션에서 아키 불룬과 아키 룽수드는 아키 룽수드의 징소리가 어디까지 들릴 수 있는 방법을 통해 경계를 표시하여 그 지역을 분할했다. 따라서 주의 깊은 관찰자들은 그 당시 퐁팟 타나 지역의 언덕 꼭대기마다 징 소리를 듣기 위해 야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징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면, 그때 비노루단이라는 창이 땅에 뚫릴 것이었다. 비노루단(Binorudan)은 해안 전사들이 사용하는 창으로, 요트 노들만큼 크고 크기는 보통이었다.

오늘날 아키불룬의 후손들은 룬구스 곤소몬으로 알려져 있는데, 룬구스 곤소몬은 한때 쿠다트 동쪽 해안을 지배했던 인물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룬구스 곤소몬어의 언어는 카다잔어와 거의 같다. 카다잔-두순 민족에 방언이 많아 아키 룽수드와 아키 룽수바이가 분리되기 전에 사용한 원어는 모모군 룽구스였다고 생각된다. 식민지 개척자들이 처음에 페남팡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기 때문에, 당시 식민지 기업의 이익을 위한 상점이 설립되면서 초기 발전이 있었다. 선조에 따르면, 「케다이케다이」 또는 상점 지역에 정착한 아키 룽구바이족은 원래 카다잔족으로 알려져 있었다. 룽구스에서 카카다잔은 "shops" 또는 기본적으로 마을을 가리킨다. 아키룽수드족이 아키룽수바이족을 지칭할 때 '가게 지역이나 더 발전된 곳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의 튤런 안타드 사이드 카카다잔이라고 부르곤 했다.

누누크 라강 지역은 아키 투룸포크가 라부스 종교법(동물주의)을 버림으로써 잠시 후 혼란의 장소가 되었다. 아키 투룸복은 누누크 라강 지역이 코피조(나쁜 징조)를 얻는 결과를 초래한 마법의 세력 경쟁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서로 다투고 적대감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상태는 마마시 의식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이 퍼지면서 끝났다.

언어

카다잔 방언은 여러 가지 외래어를 채택했는데, 특히 북부 보르네오 토착 언어와 말레이어에서도 많이 채택되었다.

말레이시아 연방정부의 말레이어 사용과 선교사의 영어 사용으로 인해 언어 사용이 감소하고 있는데, 이는 식민지 및 연방정부 모두의 작업에 의해 시행된 언어이동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바 주는 이러한 감소를 막기 위한 정책을 도입했는데, 이 정책은 다른 원주민 사바한어족에게도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는 공립학교에서 카다잔과 다른 토착어를 사용하는 정책이 포함되었다. 그 언어가 국가에서 공식화되도록 하기 위한 노력도 이루어졌다.

2005년 초 유네스코의 보고에서 카다잔-두순 언어는 30만 명에 불과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멸종 위기에 처한 언어로 분류되었다. 이 언어는 멸종위기에 처한 전 세계 7,000개의 다른 언어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16] 긍정적인 측면으로, 카다잔두순 언어 재단(KLF)의 다투크 필립 라심방 이사장은 카다잔두순 언어가 우리 교육 시스템에 들어갔기 때문에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고, 공식화되었고 제도화되었다.[17]

카다잔어와 두순어의 유사점은 이 두 언어의 화자들이 서로를 쉽게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간단히 말해서, 이 두 언어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음소 차트의 차이점이다.

통일

현재, 카다잔족은 카다잔-두순이라는 포괄적 용어 하에 또 다른 비슷한 원주민 부족인 두순족과 여러 다른 원주민들과 함께 연관되어 있다. 이는 정치적 공작의 결과로 공식 인정되며, 특히 비정치적 5차 KCA(Kadazan Cultural Association)의 결의로, 1989년 11월 4일과 5일 사이에 열린 Kadazan-Dusun 문화협회(KDCA) 대표자회의로 개칭되었다. 1960년대 초 카다잔 대 두순 정서가 정치화된 이후, 카다잔-두순 다민족 공동체의 성장과 발전을 사회문화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마비시키고 방해했던 "카다잔" 또는 "두순" 정체성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대안적 접근법으로 결정되었다.

카다잔과 두순은 비록 방언의 차이는 있지만 언어와 문화에서 약간의 유사성을 공유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지리적 영향을 두 민족간의 주요한 차이점으로 여긴다. 카다잔은 주로 논밭농사에 도움이 되는 평평한 골짜기 들타에 거주하고 있는 반면, 두순은 전통적으로 사바 내륙에 흔한 구릉지대와 산악지대에 거주하고 있다.

토착적 지위

사바와 말레이시아의 일부인 카다잔인들은 말레이시아의 지배적인 말레이 인구와 동일한 정치적, 교육적, 경제적 권리를 부여 받는다. 이것에 기인하는 용어는 말레이어Bumiputra(산스크리트 Bhumiputra에서 유래)로, '땅의 아들들'로 번역된다.

참고 항목

참조

  1. ^ United Nations, Discovery Channel (1 January 2004). "Kadazandusun, Malaysia". UNESCO. Retrieved 1 January 2004.
  2. ^ 게놈 범위 SNP 데이터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323665511에서 추론한 바와 같이, 북부 보르네오 원주민 집단과 동남아시아의 인접 인구 사이의 유전적 관련성.
  3. ^ Mercurio, Philip Dominguez (2006). "Traditional Music of the Southern Philippines". PnoyAndTheCity: A center for Kulintang - A home for Pasikings. Retrieved 25 February 2006.
  4. ^ Matusky, Patricia (1985). "An Introduction to the Major Instruments and Forms of Traditional Malay Music". Asian Music. 16 (2): 121–182. doi:10.2307/833774. JSTOR 833774.
  5. ^ "Assessment for Kadazans in Malaysia".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2 June 2012.
  6. ^ "Dr Elizabeth Koepping, Centre for the Study of Christianity in the Non-Western World, Edinburgh".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1 November 2008.
  7. ^ "Voices of the Earth".
  8. ^ "More Foreigners In Brunei Embrace Islam".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0 June 2011.
  9. ^ "WebCite query result". www.webcitation.org.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5 October 2009. Cite는 일반 제목(도움말)을 사용한다.
  10. ^ "Mount Kinabalu: the Sacred Emblem of the First UNESCO World Heritage Site on Borneo".
  11. ^ "Kadazan-Dusun genesis". Kadazan Dusun Cultural Association Sabah.
  12. ^ "Austronesian Expansion".
  13. ^ "Sabah Folklore, Legends and Superstitions". Kadazandusun Cultural Association Sabah.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9 February 2011. Retrieved 21 July 2010.
  14. ^ "Nunuk Ragang".
  15. ^ "Kadazan History Timeline". KadazanHomeland.com.
  16. ^ Richard A. Gontusan (1 October 2017). "The Kadazan-Dusun language dilemma". Daily Express. Retrieved 1 October 2017.
  17. ^ "Kadazan language won't go extinct: KLF". Daily Express. 16 October 2016. Retrieved 16 October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