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세리터스

Rudolf Seiters
루돌프 세리터스
RudolfSeiters.jpg
연방 내무부 장관
재직중
1991년 11월 26일 – 1993년 7월 7일
선행자볼프강 샤이블
성공자만프레드 칸터
연방 찬스텔러리 서장
연방 특수부 장관
재직중
1989년 4월 21일 – 1991년 11월 26일
선행자볼프강 샤이블
성공자프리드리히 볼
개인내역
태어난 (1937-10-13) 1937년 10월 13일 (84세)
독일 프로이센 하노버오스나브뤼크
정당CDU
직업법률 조수

루돌프 세리에르스(Rudolf Seiters, 1937년 10월 13일 오스나브뤼크 출생)는 CDU(기독교민주연합) 정당의 독일 정치인이다.

1989-1991년, 그는 연방 특수부 장관독일 챈슬러리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1991-1993년 그는 내무부 장관이었다. 1998~2002년부터 독일 번데스타그(Bundestag), 즉 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2003년부터 독일 적십자사 총재로 재직하고 있다.

인생과 직업

1959년 오스나브뤼크에 있는 체육관 캐롤리니움을 졸업한 세리터스는 뮌스터 대학을 법학 전공으로 졸업, 1963년 첫 시험(학사학위)을, 1967년 두 번째 시험(전문학위)을 마쳤다. 1968년부터 1969년까지 경제사회주택국 오스나브뤼크 사무실의 법률조교였다. 2003년 11월부터 독일 적십자사 총재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세 딸과 결혼하여 파펜부르그에 살고 있다. 2000년에는 분데스웨어 대학 뮌헨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파티

1958년부터 CDU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63년부터 1965년까지 CDU 청년단체 준게연합의 오스나브뤼크-엠스랜드 지부의 자치구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 후 1965~1968년, 하노버 주 지부장을 지냈고, 1968~1971년 새로 창설된 로어 작센 지부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그는 더 나아가 Jungge Union의 연방 집행 위원회 멤버였고, 1971년부터 1973년까지 CDU 자체의 연방 관리 위원회 멤버였다. 1972~1998년 로어 작센에서 CDU의 부비서관을 지냈으며 1992~1998년에는 CDU 국가집행위원회 위원이기도 했다.

대표로서

1969~2002년 세리터스는 독일 의회인 번스타그 소속이었다. 그곳에서 1971~1976년, 1982~1984년 CDU/CSU 의회 분당의 집행위원(Geschéftsfuhrer)으로 재직했으며 1984~1989년까지는 당 분당의 최고 집행위원으로 재직했다. 1994년 선거 후, 그는 분당의 부의장이 되었고, 1998년 번데스타그 부통령이 될 때까지 그가 유지했던 직위는 그가 번데스타그 부통령이 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프라하 대사관 협상

1989년, 수천 명의 동독인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 프라하 대사관을 피신했다. 루돌프 세리터스는 동독정부(DDR)와 대사관 난민들의 독일 연방공화국 통과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쳤다.[1]

각료직

세리터스는 1989년 4월 21일 연방 특수부 장관독일 챈슬러리 사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91년 11월 26일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93년 6월 27일 독일 경찰이 배드 클라넨메클렌부르크 시내 기차역 습격사건에서 적군파(RAF)의 수배 테러범 볼프강 그램GSG 9 요원 마이클 뉴르젤라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세리터스는 이번 공습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93년 7월 4일 물러났다.

캐비닛

세리터는 내각3세내각 4세의 일원이었다.

수상

  • 2008년에 Seiters 박사는 알렉산드라 힐데브란트가 수여하는 레이너 힐데브란트 박사 인권상을 받았다. 이 상은 매년 인권에 대한 비상하고 비폭력적인 헌신을 인정받아 수여된다.[2]

참조

  1. ^ "Der zweite Mann". Der Spiegel (in German). Retrieved 11 September 2010.
  2. ^ "Archived copy".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6-06-28. Retrieved 2016-06-28.{{cite web}}: CS1 maint: 타이틀로 보관된 사본(링크)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