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진 전투
Battle of Ongjin옹진 전투는 한국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포풍 작전의 일환이었다. 대한민국 육군 17보병연대는 옹진에서 탱크업체가 지원하는 조선인민군 14보병연대와 3보병여단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1]
전투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14보병연대 - 한일래 대령
- 제3경비여단 - 최현 준장
대한민국
- 17보병연대 - 백인엽 대령
- 1보병 대대 - 김희태 소령
- 2보병 대대 - 송호림 소령
- 3보병 대대 - 오익경 소령
- 7포병 대대 - 박연호 소령
지역특성
옹진반도는 38선의 최서단에 위치한다.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유일한 육로는 북한 영토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반도 중앙에는 한반도 전체를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전략적인 산이 있다. 옹진 전투 이전에, 두 적대 세력은 이미 1949년에 이들 산 근처에서 세 번의 충돌을 겪었다.[1]
한국석유공사는 인근에 공급기지를 건설했고, 물자는 철도로 수송할 수 있었다. 반면 한국군은 한반도 남동쪽에 위치한 부포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간선 폭이 넓어 대형 선박은 하루 두 차례만 부포항 부두와 나란히 올라올 수 있었다.[1]
서곡
대한민국 17보병연대는 1950년 6월 20일부터 38선 북측에서 의심스럽고 특이한 움직임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이 연대는 북한 기지와 야산에서 북한 고위 장교들을 많이 목격했지만 북한 민간인은 보이지 않았다. 연대가 경계태세를 해제하라는 명령을 받자 연대장 백인엽은 그 명령을 무시하고 북한으로부터 혹시 있을지 모를 공격에 대비해 자신의 연대를 삼엄한 경계태세로 유지했다. 결국 백수웅은 최전방을 제외한 경계태세를 낮췄다. 그러나 유엔군이 연대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백병장에게 경고가 예방할 수 있는 바로 그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라며 경고를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전투 전날 백수웅은 모든 부대를 방어태세에 배치하도록 지시해 이번 공격에 대비해 연대에 전투태세를 부여했다.[1]
준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룡을 최대한 빨리 점령하는 것이 북한군의 주요 목표였다. 서쪽에서 제3경비여단이 준비했고, 제203기갑연대의 장갑대대를 거느린 제14보병연대는 강룡을 사로잡는 임무를 맡았다.[1]
대한민국
17보병연대는 제한된 병력으로 45km의 노선을 방어해야 했다. 제1보병대대는 서쪽을, 제3보병대대는 동쪽을 가렸으며, 제2보병대대는 후방에 주둔하여 구호 역할을 하였다. 연대는 북한의 1차 대상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제3보병대대의 보호를 받는 강룡에 전력을 집중했다. 강룡을 함락시키면 연대는 후퇴의 길과 함께 전투력을 절반이나 잃게 된다.[1]
전투
6월 25일 04:00에 붉은 불꽃이 공중에서 발사되었고 한국 공군은 30분 동안 한국 방어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포병 공격 후 대대 규모의 KPA 부대가 한국 1대대를 들이받았다. 대대 소속 2개 업체는 손발을 맞춰 싸웠지만 KPA 강화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1]
유무선 통신이 모두 파괴되면서 김 소령은 후퇴하는 병력으로부터 상황을 알게 됐다. 그는 예비 회사를 앞으로 보냈지만, 이 노력은 실패했다. 김 소령은 이후 KPA 포병에게 사살됐다.[1]
한편 KPA 14연대는 05시 30분까지 한국 3대대에 대한 포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미군 참모들이 이 대대의 105mm 포를 완전히 통제했기 때문에 몇 시간 뒤까지 포격을 되돌릴 수 없었다.[1]
KPA군이 탱크와 장갑차로 한국 방어를 공격하자 한국군은 방어 차원에서 M18 무반동 소총을 채용했다. 이들은 어떤 탱크도 파괴하지 못했다. 이후 한국 3대대는 후퇴하여 치마산과 석계리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여 강룡과 양원이 KPA 공격에 취약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대령은 제2대대가 왼쪽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도록 1대대를 지원하라고 지시했다.[1]
제2대대는 매복해 KPA 대대를 섬멸한 뒤 반격으로 전선의 왼쪽을 되찾았다. 그러자 대대는 퇴각 명령을 받았으나, 대대가 강룡으로 철수한 것을 알 때까지 거절하고 방어선을 유지했다. 대대장 송 소령은 1, 2대대를 모두 이끌고 불당산으로 갔다. 부대가 불당산에 도착했을 때 이미 KPA군은 양원과 강룡을 점령한 상태였다. 송 소령은 부포항으로 이동할 계획이다. 대신 사곶으로 병력을 옮기고 거기서 후퇴했다.[1]
강룡에서 후퇴한 3대대는 마지막 방어선을 만들었고 기술자들은 KPA 탱크를 멈추기 위해 다리를 폭파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한국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이후 대한 석유 협회 14연대가 강룡을 인수한 뒤 작전을 제3경비여단에 이양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더 큰 전투에 참가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1]
LST-801은 23시 30분에 부포항에 도착했고 대부분의 3대대가 승선했다. M101 하우처 1개를 제외한 중장비와 물자는 파괴되거나 바다에 던져졌다.[1]
백 대령은 LST-801에 출항 명령을 내렸다. 그는 7포대대에서 마지막 회가 발사될 때까지 사령관인 박 소령 등 장교들과 함께 근무했다. 그들은 작은 목선을 타고 성공적으로 그 지역을 탈출했다.[1]
여파
옹진반도에 있는 한국군과 장비의 약 90%가 본토로 대피했다. 모든 손실을 만회했다 이동해 17보병연대는 대전으로. 연대는 오산 전선으로 복귀해 인천전투 등 후일 전투에 참가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