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찢어지는 능선 전투
Battle of Heartbreak Ridge가슴 찢어지는 능선 전투 | |||||||
---|---|---|---|---|---|---|---|
한국전쟁의 일부 | |||||||
북쪽에서 본 남한의 가슴 아픈 산등성이. | |||||||
| |||||||
호전성 | |||||||
북한 중국 | |||||||
지휘관과 지도자 | |||||||
클로비스 E. 바이어스 토머스 F. 데하소 로버트 N. 젊은 | 팡호산 | ||||||
관련 단위 | |||||||
사상자 및 손실 | |||||||
3,700 | 25,000 | ||||||
가슴아픈 능선 전투(한국어: :장의;;; 한자: 의의의의; 프랑스어: Bataile de Crévecurur)라고도 하는 '심장해전' 전투(중국어: 文長海戰, pinyinn: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5일 사이에 벌어진 한국전쟁의 한 달간의 전투였다. 조선인민군(KPA)은 블러디 리지(Blood Ridge)에서 철수한 뒤 7마일(11km) 길이의 언덕 미사에 1500야드(1400m) 떨어진 곳에 새로운 진지를 세웠다. 어찌됐든, 이곳이 블러디 리지보다 방어력이 훨씬 더 강했다.
가슴 아프게 하는 능선 전투는 초원 부근 38도선(남북의 전쟁 전 경계선)에서 북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북한의 야산에서 있었던 여러 주요 전투 중 하나였다. 중국인에게 이 전투는 1년 뒤 벌어진 삼각고지 전투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
배경
블러디 리지 전투 중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매튜 리드웨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8군 동부 전선의 처진 부분을 제거하기 위해 1~15마일(1.6~24.1km)의 진격을 계획하고 있는 개요 계획안을 제출했다. 리드그웨이는 원산 부근의 수륙양용 상륙과 북한으로의 깊은 진격을 위한 보다 야심찬 계획을 거절하였지만, 겸손한 지상 공격에는 이의가 없었다. 탈롱에 대한 준비는 9월 5일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때 밴 플릿트는 분명히 블러디 리지로부터 최종 사상자 합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탈론스가 훨씬 더 큰 규모에 달할 것이기 때문에 밴플릿은 이 작전이 생명과 마테리아에 드는 예상 비용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결정했다. 대신 그는 리드그웨이에게 9월 남은 기간 동안 8군 오른쪽 측면에서의 "조종"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알렸으며, 어떠한 명확한 객관적 노선도 할당되지 않은 채 "팔꿈치" 전술을 사용했다. 10월 1일경 그는 휴전협상이 허락된다면 동부에서의 공격작전을 중지한 다음, 이달 중순쯤 미 1군단의 서쪽에서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만약 이 1군단의 작전이 성공적이라면 반 플리트도 통촌 인근 동해안에서 수륙작전을 펼쳤을 것이다. 이것은 금화에서 북동쪽으로 진격하는 땅과 연결될 것이다. 제8군 사령관의 신속한 계획 변경은 리드웨이를 놀라게 했지만, 그는 기회주의적 차원에서 제한된 객관적 공격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안된 수륙양용 공격은 계획적인 목적으로만 승인할 것이다.[1]
밴플릿은 9월 8일 부대 지휘관들에게 제한된 객관적 공격, 정찰, 순찰 등을 강조하는 총지휘를 내렸다. 그는 같은 날 블러디 리지 바로 북쪽과 펀치볼 바로 북쪽에 있는 산등성이를 타라는 X 군단에게 지시와 함께 지시를 따랐다. X군단 맞은편 KPA가 블러디 리지(Blood Ridge)에서 막 패배를 당했으므로 밴 플리트(Van Fleat)는 즉각적인 추력이 그들을 균형을 잃게 하고 KPA가 회복할 기회를 갖기 전에 새로운 능선들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X 군단은 블러디 리지 북쪽 봉우리를 미 2사단에 맡겼다. 목표는 문둥리 계곡(38°181840″N 127°5)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길고 좁은 능선의 남쪽 끝이었다.9 and09″E / 38.311°N 127.9858°E/ ) 서쪽 및 사태리 계곡(38°18′00″N 128°0)2′53″E / 38.3°N 128.048°E/ ) 동쪽의 주 능선에서 동서로 아치하는 돌출된 굴곡은 한 관찰자가 목적을 "수백 개의 척추뼈가 있는 물고기의 척추 기둥"으로 설명하도록 만들었다. 중앙 능선을 보유하게 되면 KPA가 인접한 계곡을 이용해 펀치볼 서쪽의 X군단 방어선을 공격할 수 없게 된다. 하트브레이크 리지는 나중에 이 행동을 취재하는 통신원들에 의해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에 3개의 주요 봉우리를 가지고 있었다. At the southern terminus was Hill 894 (38°17′23″N 128°00′58″E / 38.2898°N 128.0162°E) which commanded the approach from Bloody Ridge, 3 miles (4.8 km) to the south; Hill 931 (38°18′05″N 128°00′58″E / 38.3015°N 128.0161°E), the highest peak in the ridge, lay 1,300 yards (1,200 m) to the north; and 2,100 yards (1,900m) 힐 931 북쪽에서는 힐 851(38°181857″N 128°00′59″E / 38.3157°N 128.0163°E/ )의 바늘처럼 돌출된 돌출부가 솟아올랐다.[1]: 87–8
블러디 리지(Blood Ridge)에서 철수한 KPA는 하트브레이크의 접근 능선을 커버하는 벙커, 참호, 총포 위치로 후퇴했는데, 이전에는 2사단이 맞닥뜨렸던 것만큼 튼튼하고 위장이 잘 되어 있었다. 9월 5일 피비린내 나는 능선 전투가 끝나고 8일 후 심장마비 능선에 대한 공격 사이에 휴식은 한국공작원이 방어력을 더욱 강화하고 능선을 지키는 부대들과 그 접근법을 보강하는 것을 허락했다. 문둥리 계곡에서는 3군단 KPA 12사단이 수입천강 서편의 야산을 통제했고, 같은 군단 6사단은 하트브레이크 능선과 사태리 계곡 부분을 담당했다. 공중정찰 결과 KPA는 이 산등성이 옆 계곡에 포병과 박격포 부대를 집결시키는 등 하트브레이크 리지 지역에서 매우 활발히 활동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육중한 숲과 저성장은 정교한 요새를 베일에 싸여 있었고, 2사단이 다시 KPA의 주요 저항선을 뚫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감추었다. 2사단 내에서는 하트브레이크 리지 공격에 대한 예상 KPA 반응 정도에 대해 상당한 의견 차이가 있었다. 포병사령관 에드윈 워커 대령은 북한 주민들이 이를 위해 "지옥같이 싸울 것"이라고 느꼈고, 참모들 중 일부는 반응이 덜 활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준장 토머스 F. 데스하소 소장 대행은 분명히 후자 그룹에 속했다. 그는 돌격대에 2개 연대가 아닌 23개 연대와 그 부속 프랑스 대대를 1개 연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23일 사태리 계곡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접근, 콜 아래. 제임스 Y. 아담스는 931년과 851년 사이에 하트브레이크를 끊을 것이다. 그 후 한 대대는 북쪽으로 돌아서 851고지를 점령하고, 다른 대대는 931고지와 894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힐 894호가 23일의 통제하에 들어오자마자, 대령 휘하의 9보병 연대. 존 M. 린치는 728번 힐을 타고 서쪽으로 2000야드(1,800m) 떨어진 894번 힐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했다.[1]: 88–9
전투
최초 폭행(9월 13~27일)
9월 13일, 2사단의 요소들이 제자리에 배치되어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령 휘하의 프랑스 대대. 랄프 몬클라르는 힐 931동쪽 3.2km가 조금 넘는 868번 힐에서 제38보병연대의 진지를 넘겨받았고, 38번대는 캔자스 선의 감시 책임을 지고 사단 예비군이 되어 있었다. 9연대는 23연대가 894고지를 획득했을 때 728고지에 진격할 태세였다. 23d연대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은 중령 휘하의 제37야전포대대에서 나올 것이다. 린튼 S. 보트라이트, 105㎜ 함포대대를 비롯해 503야전포대(155㎜ 함포대), 96야전포대(155㎜ 함포대), 38야전포대(105㎜ 함포대), 780야전포대(8인치 함포대)의 배터리C 등이 총 지원을 했다. 제37·38 야전포대대는 하트브레이크 능선에서 남동쪽으로 약 3마일(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96번가와 503번가는 각각 남쪽 약 7마일(11km)과 남동쪽 약 9마일(14km)이었고, 780번가의 배터리는 하트브레이크 남쪽 약 11마일(18km)의 야트온리 부근이었다.[1]: 89
05시 30분에 포병 준비가 시작되었고 30분 동안 포병들은 하트브레이크 능선이나 근처에 있는 KPA 진지를 쾅쾅 두드렸다. 그러자 아담스 대령이 23d의 공격을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중령 휘하의 3대대대. 버질 크레이븐은 한 줄로 늘어선 회사들 속에서 선두에 섰고, 이어 중령이 지휘하는 2대대가 뒤따랐다. 헨리 F. 다니엘스. 돌격부대가 702번 언덕에서 사태리 계곡 위로 북쪽으로 이동하여 하트브레이크에 접근할 수 있는 동서의 첨탑 능선에 이르자, 한국기원은 그들을 발견했다. 하트브레이크 능선 진지부터 사타에리 마을 주변의 높은 곳에서 중포와 박격포 사격이 23연대 대원들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상자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레이븐의 부대는 압박을 가했고, 다니엘스의 부하들이 바짝 뒤따랐다. 제3대대가 동서의 첨탑에 도착하여 언덕을 올라가 하트브레이크 리지 라인을 갈라놓자 뿔뿔이 둥지로 달려들었다. KPA 1연대, 6사단은 기관총과 작은 팔로 접근 능선을 가린 은폐되고 상호 지지되는 벙커들을 유인했다. KPA 감시단이 2개 공격대대를 향해 지휘하고 있던 포병과 박격포 사격에 이어 자동무기와 소총사격으로 돌격부대가 멈춰 서고 돌격부대의 발가락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KPA 라인의 신속한 침투에 대한 전망은 밤이 되면서 사라졌다. 23일은 KPA의 주요 방어선에 맞섰고 또 다른 블러디 리지 경험이 눈앞에 다가왔다.[1]: 89
23일의 상황에 대한 보도가 드 샤조 장군에 이르자, 그는 자신이 KPA의 방어능력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린치 대령 휘하의 9연대는 이미 728 힐에 대한 숙고된 공격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9월 14일 데 샤조는 린치에게 894 힐에 대한 자신의 연대를 대신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894고지를 성공적으로 점령하면 23연대에 대한 압박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제2 대대, 제9연대는 9월 14일 야오동에서 894 힐 남서쪽 어깨로 진격해 B사, 72 전차 대대, 중격포대, 155mm 함포대대의 전차를 지원했다. 해질녘이 되자 제2대대는 광저항을 무릅쓰고 894고지 산마루에서 650야드(590m) 이내로 올라섰다. 이 공격은 9월 15일에 계속되었고 오후가 되자 한국 경찰청의 키를 휩쓸었다. 이때까지 2대대는 겨우 11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인데, 그 다음 이틀은 한국공병대가 이를 벼랑에서 몰아내려는 헛된 노력으로 격렬하고 반복적으로 반격을 가하면서 2백 명이 넘는 대대의 비용이 더 들었다. 그러나 9연대가 894고지를 보유한 것은 931고지~851고지 능선 절단을 다시 모색하면서 23일 부담을 덜지 못했다. KPA의 화력은 공격부대를 낮은 경사지에 고정시켰다. 9월 16일 애덤스 대령은 2·3대대대에게 그들이 나란히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던 기둥형성으로부터 교대하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3대대가 정당한 서쪽으로 진격하는 동안 2대대는 서남쪽으로 휘둘러 931고지 쪽으로 접근했다. 그 사이 1대대의 C사는 894고지 9연대 진지를 통과해 남쪽에서 931고지를 빼앗으려 했다. 3점슛은 한국노총이 내려놓은 묵직한 불기운을 향해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단단히 요새화된 벙커에 몸을 고정시킨 KPA 수비대원들은 2사단의 돌격부대에 주어지는 포병과 공중지원이 해제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사격 위치로 돌아갔다. 23연대의 병사들이 마지막 몇 야드를 볏을 향해 올라가자 KPA는 자동무기와 소총, 수류탄 등을 들고 문을 열었다. KPA는 심장파괴 능선에 대한 경사가 덜하고 탈선된 접근로를 제공하는 문둥리 계곡을 통제했기 때문에, 보강과 재공급 문제는 해결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KPA 6사단장인 홍님 장군은 9월 16일 1연대를 교체하기 위해 새로 창설된 13연대를 무사히 투입했다. 미 2사단의 전망은 다소 암울했다. 하트브레이크 남서쪽에 있는 좁은 피아리 계곡은 차량들로 꽉 막혀 KPA포와 박격포 사격에 노출됐다. 한국민간인 짐꾼들은 한국노총이 너무 가까워지자 종종 그들의 짐을 산책로를 따라 버리고 빗장을 걸어 덮었다. 식량, 물, 탄약, 장비를 공급받는 최전방 부대를 유지하고 사상자를 대피시키기 위해서는 종종 미군 보병들이 수송선과 쓰레기 운반선을 겸할 것을 요구했다. 험준한 지형과 하트브레이크 리지 접근에 대한 근접 KPA 감시는 그들의 일을 매우 위험하고 시간 소모적으로 만들었다. 23d 연대가 보유한 전방 위치에서 쓰레기 케이스를 격추하는 데 최대 10시간이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1]: 89–90
산등성이의 교착상태로 9월 19일 린치 대령은 KPA의 집중적인 저항을 소멸시키기 위한 공격의 확대를 시사했다. 그는 드 샤조 장군이 1대대와 9연대가 문둥리 계곡을 가로질러 894번 힐즈 남서쪽 약 3마일(4.8km)과 4마일(6.4km) 지점에 있는 힐즈 867번과 1024번지를 점령할 것을 촉구했다. KPA는 이번 공격이 서쪽에서부터 하트브레이크 리지(Heartbreak Ridge)를 포위하기 시작했다고 가정할 경우, 남자들과 총을 돌려서 도전을 막을 수도 있다고 린치는 설명했다. 그러나 드 샤조는 클로비스 E장군 이래의 제안을 거절했다. 앞서 X군단 사령관 바이어스는 힐 931에 우선 순위를 부여할 것을 지시했었다. 로버트 N 소장이요 영 신임 2사단장은 9월 20일 도착했고 린치의 계획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린치에게 힐스 867과 1024를 점령하라고 명령했고 9보병 사령관은 힐 1024에서 9월 23일로 공격을 계획했으며 힐 1024가 함락된 후 힐 867을 탈취할 예정이다. 그 동안에 밴플릿은 바이어스에게 X군단이 서부 측면을 전진시켜 전선을 미 IX군단'과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바이어스는 9월 22일 육군 7사단에 1024년 힐 북서쪽 약 2,000야드(1,800m) 지점에 위치한 힐 1142를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1024년과 1142년 힐스에 대한 이중 방어선 공격은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이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가슴 아픈 산등성이에서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제23보병대가 9월 21일과 22일 하트브레이크 리지를 상대로 벌인 공격은 거의 성공하지 못한 채 계속됐다. 1대대대, 소령 휘하에. 조지 H. 윌리엄스 주니어는 다시 힐 931을 남쪽에서 데려오려고 했고, 다니엘스의 2대대는 북쪽에서 들어왔다. 1대대의 원소들은 9월 23일 잠시 승승장구했지만 KPA의 반격을 견디지 못했다. 동쪽에서 새벽부터 발생한 KPA 3연대 12사단 소속 회사의 폭행으로 1대대가 참패하는 격렬한 싸움이 연출됐다. 그의 탄약이 떨어지자 윌리엄스는 931 힐에서 부하들을 철수시켜야 했다. 문둥리 계곡 건너편에서 9연대와 한국 7사단의 힐즈 1024와 1142에 대한 우회공격이 좋은 진전을 보였다. 9월 25일 제1대대대인 제9보병단이 1024고지의 볏을 개간했고 다음날 한국 7사단이 1142고지를 승리했다. 북쪽 계곡을 지배하는 핵심 지형인 인근 867번 힐에 대한 위협을 인식한 북한 주민들은 3연대, 6사단을 하트브레이크 능선에서 재빨리 옮겨 언덕을 방어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배치는 931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궁지에 몰린 23연대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프랑스 대대는 2개 대대를 교체하고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1개 대대는 931의 볏을 향해 북쪽으로 밀고 나가려다 9월 26일 KPA 15연대가 이들을 격퇴했다. 23연대 전차는 사태리 계곡에서 북쪽으로 멀리 이동하여 하트브레이크 동쪽 접근로를 덮고 있는 KPA 벙커 일부에 대해 직접 사격을 가할 수 있었지만, 2사단의 공격을 중단시킨 중격격포와 기관총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1]: 90–1
애덤스 대령은 9월 26일 영 장군에게 하트브레이크에 대한 KPA 방어를 거의 2주 동안 헛되이 두드린 후 원래의 계획을 계속 고수하는 것은 "자살"이라고 말했다. 그의 23연대는 이미 95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으며, 그 기간 동안 사단의 총수는 1,670명이 넘었다. 린치 대령이 그 전 주에 가졌던 것처럼 아담스는 공격 범위를 넓히고 하트브레이크에 저항할 수 있는 KPA의 능력을 분산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하트브레이크 부근에 있는 KPA군이 교전하여 KPA 15연대의 증원이나 교체를 아끼지 못하면 23연대가 마모되어 능선을 탈환할 수 있다고 느꼈다. 9월 27일까지 9월 영과 군단장 바이어스 장군은 아담스의 의견에 동의했고 23일까지는 하트브레이크에 대한 추가 공격이 취소되었다. 영은 2사단의 초기 하트브레이크를 시도한 것을 분석한 결과 부대원들의 단편적인 헌신과 소방지원단 구성 미숙으로 인해 나중에 이들을 '실패'로 규정했다. 그는 "KPA 박격포가 특히 효과적이었다"고 지적해 현재까지 사단 사상자의 약 85%를 발생시켰다.[1]: 91–2
재공격 (10월 4~15일)
예선
새로운 계획에서 사단 작전관, 소령. 9월 말에 준비된 토마스 W. 멜론은 이전의 실수를 피해야 했다. 사단의 3개 연대는 모두 사단의 모든 포병대가 지원하는 집중적이고 조정된 공격을, 72 전차대대가 문둥리 계곡을 올라오는 전면적인 장갑차 추진과 사태리 계곡에서의 전차유입 기동대 행동에 의해 개시하게 된다. 10월 2일 사단법인 터치다운(Touchdown)이라는 암호명으로 작전명령을 내리자 영 장군은 자신의 연대에 다음과 같은 목표를 부여했다. 제9보병연대는 문둥리 계곡 서쪽을 진격하여 힐스 867, 1005, 980, 1040을 점령할 것이다. 23일까지 힐 931과 그 봉우리 서쪽으로 흐르는 능선 확보 작업이 이어졌다. 또 23보병연대는 728고지를 공격하거나 38보병연대가 포획할 수 있도록 돕고 851고지 서쪽 520고지를 점령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38호는 힐 485호를 확보한 뒤 제72전차대대에 보병을 지원하게 된다. 터치다운의 목표 날짜는 10월 5일이었다.[1]: 92
터치다운을 위한 준비는 제2기술자 전투대대와 그 지휘관인 중령부대에서 엄청난 활동 기간을 필요로 했다. 로버트 W. 러브. 문둥리 계곡을 따라 난 도로는 제72 전차대대의 M4A3E8 셔먼 중형 전차에는 적합하지 않은 험난한 길이었고, 셔먼 부대를 빨리 실어 나르도록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러브와 그의 부하들은 일하는 동안 적절한 방화 커버를 갖추면 기꺼이 시도하려고 했다. 크레이터들이 선로에 점점이 찍혀 있었고 한국 경찰청은 도중에 지뢰를 심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6피트(1.8m) 높이의 큰 바위를 쌓아올리고 그 더미 위에 각각 핀을 뽑은 수류탄을 뿌렸다. 제2 공병대는 이 도로 봉쇄 주변에 110파운드의 폭발물을 설치했고 폭발물이 터지자 수류탄을 폭파했다. 인근 절벽의 바위가 폭파되어 분화구를 채웠다. 그들의 불도저가 수리 중이고 어떤 경우든 한국 공병대에서 포탄을 끌어냈을 것이기 때문에 삽으로 작업하면서, 기술자들은 사용할 수 있는 도로를 만들었다. 이들은 탐방로를 따라 지뢰를 관리하기 위해 선로 옆면에 15m 간격으로 테트라놀 체인블럭을 설치했다. 폭발로 인근 지뢰가 폭발했다. 분화구와 지뢰가 너무 빽빽해지자 기술자들은 채굴되지 않은 개울바닥으로 길을 옮기고 길을 막고 있는 바위를 치웠다. 그들은 조금씩 북쪽으로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갔다.[1]: 92–3
기술자들이 탱크 공격의 길을 준비하는 동안, 2사단 연대는 대대를 전력으로 끌어올릴 대체품을 받고 다가오는 작전을 위해 식량과 장비, 탄약 등의 보급품을 쌓았다. 23연대는 대대를 각각 48시간 동안 라인 밖으로 끌어내어 부대가 라인보다는 예비역에 있는 동안 교체대를 통합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사단은 탄약 부족으로 인해 작전이 실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캔자스 라인 전방으로 보급 지점을 설정했다. 영 장군은 또한 자신의 대대장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모든 화력을 십분 활용할 것을 확신하고 싶었다. 각 대대는 탱크와 자동 무기, 소형 무기, 박격포 등을 터치다운에 어떻게 채용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격 계획을 제출해야 했다. 하트브레이크 리지 부문의 모래 테이블 모델은 사단의 무기를 가능한 가장 좋은 위치에 배치하는 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10월 초 3개 연대는 공격 위치로 이동했다. 9단은 왼쪽 측면에 있었고, 38번대는 콜 휘하의 867번 힐로 진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프랭크 T. 마일드렌은 문둥리 계곡을 오르고 있었다. 제38호는 894번 힐 남서쪽에 있는 새곤배 근처에 정차할 것이다. 38부대의 3대대는 사단 예비대가 될 예정이었고 영 장군의 허락을 받아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속된 네덜란드 대대는 38대대에 3개 전대를 지원했다. 하트브레이크 리지에서는 23 보병대가 힐스 894, 931, 851 사이의 노선에 4개 대대 중 2개 대대를 유지했다. 사태리 계곡 지역의 사단의 오른쪽 측면을 보호하고 케네스 R 소령 휘하의 태스크포스(TF)인 KPA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제23보병연대의 스터맨은 10월 3일에 조직되었다. 제23 전차사, 제2정찰사, 프랑스의 개척자 소대, 특수사단 보안부대 소속 보병사로 구성된 기동부대 스터먼은 하트브레이크 리지 동쪽에 있는 KPA 벙커를 파괴하고, 판매된 제23보병 발에서 KPA 화재를 끌어내는 미끼 역할을 하는 2차 임무를 맡았다.산등성이에 [1]: 93 나부끼다
터치다운 작전
10월 4일 49대의 전투기가 사단 부문을 점령했고 기동부대 스터먼이 사태리 계곡을 급습했다. 2d의 다른 부대는 다음 날 밤 21시로 예정된 공격을 위한 마지막 리허설을 했다. 소방지원팀은 보통 박격포, 기관총, 소총,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공격보병대가 출동할 수 있는 자동무기를 조합하여 설치하여 드라이런스를 실시하였다. KPA 벙커와 강점을 상대로 추가 화력이 매우 유용할 것이다. 10월 5일 늦은 오후, 사단의 포병대대가 문둥리 계곡 일대에서 제9연대와 제38연대를 마주하고 있는 방어 KPA 부대를 숙청하기 시작하면서 포병 준비가 시작되었다. KPA 3연대는 서쪽에서 동으로 배치되어 867번 힐을 점령하였고, 1연대는 북서쪽으로 636번 힐에서 974번 힐로, 15연대는 931번 힐에서 발굴되었다. 9월과 10월 초 2사단이 이들 부대에 대해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한 결과, 이들 중 천 명에 달하는 병력은 하나도 없었다. KPA 12사단과 6사단은 모두 터치다운 전야에 이르러 훨씬 저력을 발휘했다.[1]: 93–4
미 해병대 F4U 코르사르의 공습으로 이날 저녁 Napalm, 로켓, 기관총 탄환이 KPA 라인에 투하됐다. 서쪽에서는 제3대대대, 제9보병대가 867고지를 향해 밀고 10월 7일까지는 광저항만을 만나 볏을 획득했다. 그 후 대대는 960 힐을 향해 북서쪽으로 돌았고, 1 대대는 666 힐을 향해 북쪽으로 공격했다. 두 언덕 모두 10월 8일에 무너졌다. 그 후 9단은 666번 힐 북서쪽 1005번 힐로 밀고 나갔고 10월 10일 총검 폭행이 일어난 후였다. 다음날 한국 8사단은 1050고지를 획득했고 김일성 사거리는 9연대 서쪽에 위치했다. 한편 38연대는 지난 10월 4일 경찰청이 728번 힐에서 남쪽으로 1마일(1.6km) 떨어진 485번 힐을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0월 6일 정오까지 1대대는 485 힐에서 진격하여 728 힐을 가벼운 반대에만 반대하여 점령했다. 제2대대는 문둥리 계곡에 배치하여 10월 8일에 떨어진 636 언덕을 공격했다. 이 두 언덕의 소유는 러브 대령의 기술자들을 위한 것으로, 그들은 이제 72 전차 대대의 진격을 위한 탱크 트레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중령이 지휘하는 72기. 존 오 우즈는 10월 7일에 38일에 붙었고 연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새로운 목표가 주어졌다. 636번 힐에서 북쪽으로 2000야드(1,800m) 떨어진 힐 605번 힐, 김일성 사거리를 따라 636번 힐에서 1220번 힐까지 북서쪽으로 뻗은 힐 905-힐 974번 능선, 974번 힐에서 북쪽으로 1000야드(910m) 떨어진 힐 841번 힐.[1]: 94
가슴 아픈 산등성이에서 23연대도 고무적인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애덤스 대령의 전투 계획은 윌리엄스 소령의 제1 대대에게 851 힐을 향해 북쪽으로 우회 압력을 가하도록 지시했고, 프랑스 대대는 931 힐을 향해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대니얼스의 2대대는 대니얼스의 뒤를 이어 남쪽에서 크레이븐의 3대대를 예비군으로 삼아 931 힐을 명중시키곤 했다. 밤과 사단의 나머지 부대가 제공하는 산만함을 틈타 대니얼스의 부대는 밖으로 이동했다. KPA 화재는 이 대대에 빠르게 들어왔지만, 북한 주민들은 이 공격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제3대대를 지원하면서 다니엘스의 병력은 천천히 힐 931로 다가갔다. 기습의 원소를 보존하기 위해 포병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제37 야전 포병대대는 공격이 진행되면서 알려진 모든 KPA 박격포 진지들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대격포의 효과성은 23보병들이 가벼운 실점만 한 뒤 한국공병원과 함께 문을 닫으면서 도움이 됐다. 화염방사기, 수류탄, 그리고 작은 팔이 23세의 진격을 수 주 동안 막아왔던 가공할 벙커로부터 KPA를 뿌리 뽑았다. 03:00까지 제2대대와 제3대대가 931 힐 남반부를 이겼다. 기대했던 KPA 반격이 와서 퇴짜를 맞았다. 날이 밝으면서 진격은 새로워졌다. 프랑스 대대는 북쪽에서 출동했고 2·3대대는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압박을 가했다. 931번 힐은 마침내 23보병의 소유였다. 이어 크레이븐의 3대대는 851번 힐의 마지막 목표에 대한 공격에서 1대대에 합류하는 것을 강행했다.[1]: 94–5
사태리 계곡에서는 기동부대 스터맨의 탱크가 일광 습격을 지속했고 851번 힐 동쪽 비탈에 있는 벙커들을 계속 폭격했다. 서쪽 문둥리 계곡에서는 우즈의 72 전차대대가 러브의 기술자로부터 날아오는 고어헤드 신호를 기다렸다. 10월 10일 공병대는 임무를 마치고 L사, 38보병, 그리고 공병 소대를 대동한 72대의 셔먼이 북쪽 골짜기 위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운 좋은 우연의 일치로 KPA는 가슴 아픈 리지-문둥리 분야에서 KPA V 군단의 급속히 해체되는 요소들을 해소하는 도중에 잡혔다. 인민의용군(PVA) 204사단, 68군단의 전진요소는 이미 공석이 공석인 진지를 인수하는 과정에 있었다. 탱크 추진력과 나머지 2사단의 일반적인 전방 이동은 PVA가 그들의 새로운 위치로 가는 도중에 여전히 열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즈의 탱커들은 도중에 손실을 입으면서도 PVA 부대에 큰 손실을 입히고 Heartbreak Ridge의 서쪽 비탈면까지 공급과 교체 루트를 끊으면서 문둥리 이상까지 질주했다. 약 100야드(91m) 간격으로 계곡 북쪽 해역에서 보병 없이 작전 중인 전차들은 서로를 엄호하고 기회의 표적을 향해 사격할 수 있었다. 그들은 PVA 구제를 완전히 흐트러뜨리고 그 뒤의 날들에는 보병의 임무를 훨씬 더 가볍게 만들었다. KPA/PVA는 문둥리 계곡에서 탱크를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길을 여는 사랑의 기술자들이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전투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제3대대대 38보병대는 전차 진격을 이용해 힐 605를 점령했으나 10월 10일 힐 905를 점령하려던 2대대의 시도는 무뎌졌다. 다음날 2대대는 PVA/KPA의 반대를 극복하고 1대대는 힐 900을 점령했다. 10월 12일 1대대는 김일성 사거리를 향해 밀고 나가 974고지를 점령했다. 38번 힐 1220호의 최종 목표는 10월 15일에 떨어졌다.[1]: 95
하트브레이크 리지에서는 13사단인 KPA 23연대가 자매 연대인 21, 19연대의 지원을 받아 851 힐을 방어했다. 21번째는 바로 뒤쪽에 있었고 19번째는 사태리 계곡을 지켰다. 10월 10일, 대니얼스 대령의 2대대는 하트브레이크 능선에서 휘둘러서 문둥리 마을에서 남쪽으로 1마일(1.6km) 조금 넘는 520 언덕을 점령했다. 520번 힐은 851번 힐로 이어지는 동서 능선 돌풍의 끝이었다. 그 후 이틀 동안, 제1군과 프랑스 대대는 벙커로 벙커로 목표물을 향해 북쪽으로 향했고, 치열한 전투에서 거의 포로를 데려가지 않았다. 951 힐의 KPA/PVA는 저항을 멈추기 전에 죽거나 부상을 입어야 했다. 크레이븐 대령의 3대대는 서쪽에서 압력을 가하기 위해 힐스 520과 851 사이의 급류로 이동했다. 마침내 10월 13일 동틀 무렵, 몽클레르의 프랑스군이 봉우리를 습격했고, 30일간의 힘든 전투 끝에 하트브레이크 리지는 23보병의 손에 들어갔다.[1]: 95–6
여파
긴 전투의 비용은 양측 모두에게 높았다. 2사단은 9월 13일부터 10월 15일까지의 기간 동안 3,7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으며, 23연대와 소속 프랑스 대대는 이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KPA 6사단과 12사단과 13사단과 PVA 204사단은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KPA/PVA 손실 2사단의 추정치는 총 25,000명에 육박했다. 이 사상자의 약 절반은 터치다운 작전 중에 발생했다. 사상자의 증가는 탄약 지출의 비슷한 증가를 동반했었다. 사용된 수백만 발의 소형 무기탄약 외에 2사단은 76mm포 6만2000발, 105mm 하우처 40만1000발, 155mm 하우처 8만4000발, 8인치 하우처 1만3000발 등 포병 지원을 받았다. 사단 박격포 대원들은 60mm, 81mm, 4.2인치 박격포 11만 9천여 발을 보냈고 57mm, 75mm 무반동 소총 대원들은 KPA/PVA에서 거의 18,000발을 지휘했다. 극장 차원에서는 일부 탄약이 부족했지만, 밴플리트 사령관은 2사단장에게 "직책을 맡는데 필요한 모든 탄약"을 발사할 수 있는 허가를 내주었었다. 제5공군은 사단이 부여한 포병 지원을 보완하기 위해 하트브레이크 리지(Heartbreak Ridge) 지역 상공에 842개의 출격식을 날렸고 한국공군기동대(KPA/PVA)에 250톤의 폭탄을 풀었다. KPA의 깊은 벙커들을 상대로, 직격탄 이하의 것은 모두 효과가 없었다.[1]: 96
가슴 찢어지는 능선 투쟁과 그 직전의 전임자인 블러디 능선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들이 있었다. 두 경우 모두 북한 주민들은 강력한 방어 태세를 심층적으로 조직했고, 병참적 지원과 증원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방어 루트가 훼손되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유엔군은 KPA 포병과 박격포 사격이 매우 효과적으로 가린 노출된 경로를 넘어 진격해야 했다. 2사단의 진격은 한국 공군이 비교적 적은 수의 목표물에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한 극히 위험하고 느렸다. 두 공격에서 모두 KPA 역량과 저항 의지가 과소평가된 상태였다. 각각은 최전방의 처진 곳을 바로잡기 위한 소규모의 진전으로 계획되어 있었으며, 각 진영은 승리 후 목표를 강화하고 통합하기에 충분한 예비비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었다. KPA가 8군단에 반격을 가한 후, 후자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트브레이크에서 사단장인 바이어스 장군은 터치다운 작전이 있을 때까지 2사단의 38보병연대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훨씬 전에 23보병연대가 애덤스 대령의 부대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한 능선을 탈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38기는 서비스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10월까지 분업적립금을 유지했다. 사령부 차원에서 2사단은 두 작전 중 지휘부의 변화가 있었다. 드 샤조 장군은 블러디 리지 전투가 아직 진행 중인 동안 사단을 점령했고, 그는 하트브레이크 전투가 잘 진행된 후 영의 뒤를 이어 차례로 사단을 점령했다. 각자 자신이 물려받은 작전을 성공적으로 매듭지었지만, 원래의 전투계획이 상당히 확장된 후에야 비로소 비로소 그 결과를 얻게 되었다. 목표의 최종 달성은 한국학술진흥원에 대한 압력이 하나가 아닌 여러 지점에서 가해졌을 때 이루어졌다. 그 후 위협적인 모든 위치로 대체품을 투입하거나 그의 포와 박격포 사격을 좁은 지역에 집중시킬 수 없게 되자 KPA는 마지못해 다음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자주 유엔군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포병, 전차, 공중 지원에도 불구하고 한국공병대는 보병 무기에 의해 벙커에서 홍조를 받은 후에야 떠나곤 했다. 피비린내 나는 릿지의 KPA는 소모와 우월한 힘으로 그들이 굴복할 때까지 전투 내내 결의와 용기를 가지고 싸웠다.[1]: 96–7
터치다운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X군단은 펀치볼(Punchbowl) 서쪽의 미 2사단과 한국 8사단이 보유한 라인에서 사그(sag)를 제거했다. 이 전선을 따라 5마일(8.0km) 이상 진격하면서 X군단의 노선이 짧아졌고, 미 IX군단의 노선과 단계적으로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러자 8군단은 더욱 야심찬 후속작인 작전 특공대를 계획했다.[1]: 97
여론은 이러한 성격의 "제한된 객관적" 작전에 반대했고, 군사 검열 결과, 하트브레이크 리지 이후 벌어진 다른 10월 전투에 대한 언론의 집중도가 훨씬 낮아졌다.[2]
토니 K 중사 1등병장. L사의 버리스, 38 보병 연대는 전투 중 그의 행동에 대해 사후 명예 훈장을 수여받을 것이다.[3]
대중문화에서
이 전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하고 주연한 1986년 영화 '하트브레이크 리지'의 제목과 뒷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이스트우드의 캐릭터는 하트브레이크 리지(다른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전투의 허구적인 베테랑으로, 명예훈장을 받았다. 영화 자체가 그레나다에서 실제 작전 중 벌어진 사건을 허구적으로 다룬 것이다.
2004년 한국 영화 태극기도 이 전투를 영화의 마지막 전투이자 클라이맥스(이는 한국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브리핑하면서 힐즈 931과 851을 점령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언급할 때 증명된다)로 다루고 있다.
크리에브슈르(Heartbreak)는 자크 뒤퐁이 1955년 개봉한 프랑스 전투 다큐멘터리로, 전투를 소재로 하고 실제 전쟁 장면을 사용한다. 1955년 최우수 다큐멘터리 부문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하트브레이크리지(Heartbreak Ridge)는 RTS(Real-time strategy)[4] 컴퓨터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지도다. 2009년 한국에서 발매되었으며 이후 프로 스타크래프트 장면에서 비한국 리그와 아마추어 플레이에서뿐만 아니라 많은 리그에서 사용되고 있다.
'M*A*S*H 심장마비 능선'은 9B01편 '트릭 오어 트리트먼트'(시즌 11, 에피소드 2)에서 '조기 추수감사절' 때 '베틀레슨, 우스터, 그린웨이드'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들의 친구들이 빈 여우굴에서 살해된 장소로 언급됐다.
프랑스 작가 장 라르테구이는 프랑스 대대에서 싸웠으며, 하트브레이크 리지 전투에서 적군의 수류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의 소설 레스 메르세데스(1963년)는 전투에 대한 고도의 허구화된 묘사다.
참조
-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Hermes, Walter (1992).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pp. 86–7. ISBN 9781410224842. 이 글은 공개 도메인에 있는 이 출처의 텍스트를 통합한다..
- ^ 보헤이스, 멜빈 B. LTC 미군. 코리안 테일즈. 사이먼과 슈스터. NY. 1952: 페이지 101–116.
- ^ "Korean War Medal of Honor Recipients Tony K. Burris".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Retrieved March 24, 2019.
- ^ &query=heart&PageNo=1 Heartbreak Ridge ver.1 및 &query=heart&PageNo=1 Heartbreak Ridge ver.1.
참고 문헌 목록
- 블레어, 클레이, 잊혀진 전쟁, 뉴욕: 타임스 북스 (1987년)
- Fehrenbach, T. R., This Kind of War, New York: 맥밀란(1964)
- 625전쟁 백과사전, 스펜서 터커(edd.) 뉴욕: 체크 표시(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