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즈와이 전투
Battle of Panjwaii![]() |
판즈와이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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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일부(2001~202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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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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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과 지도자 | |||||||
| 지역 탈레반 지휘관 | ||||||
힘 | |||||||
2,000 | 저항군 1500~2000명 | ||||||
사상자 및 손실 | |||||||
![]() ![]() | 1000명 이상 사망(NATO 추정) |
판즈와이 전투는 2006년 중반 주로 캐나다군과 아프간군 사이에 벌어졌으며 네덜란드군, 미국군, 영국군, 탈레반의 지원을 받았다. 그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에 부대가 개입된 경우는 두 번이 따로 있었다. 1단계는 2006년 7월, 2단계는 2006년 9월부터 10월까지 계속되었다.
봄 파이팅
폭력과 전투의 여름 급증 전에 판즈와이 지구에는 제한적인 접촉이 있었다. 5월 17일, 캐나다 군인과 탈레반 전사들 사이에 많은 전투가 있었다. 한 접촉자는 캐나다 최초의 여성 전투 무기 사상자인 니콜라 고다드 대위의 목숨을 앗아갔다. 같은 날 또 다른 접촉에서는 마이클 토머스 빅터 데닌 중사의 영웅적 행위로 훗날 그가 밀리터리 발레 훈장을 받게 되었다. 이 초기 전투 이후 오리온은 5월 23일부터 6월 14일까지 판즈웨이와 자리에 지구에서 전투 그룹으로 활동했으며, 수많은 탈레반 단체(각각 30~40명의 전투기를 포함)와 고전적인 '런닝 전쟁'을 벌였다. 기동대는 그 기간 동안 37발의 총격전을 기록했다. 그 후, 2006년 6월 14일부터 7월 7일 사이에 패트리샤 2공주의 캐나다 경보병(PPCLI)의 B 회사는 판즈위이에 남아 탈레반이 그곳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았고, 나머지 태스크 포스는 북부 칸다하르에서 활동했다.
판즈와이 1차 전투 – 자하라 작전
2006년 7월 중순, 마운틴 스러스트 작전에 관여한 캐나다와 아프간 군대가 탈레반 거점 지역을 정리하는 것을 돕기 위해 판즈와이 지역에 들어왔다. 7월 8일, 탈레반 세력이 판즈와이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파고들기로 결정한 진흙 벽 단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치열한 전투가 여전히 진행 중인 가운데 공세에 나선 캐나다군과 아프간군은 순식간에 전장을 장악했다. 이번 전투에서 탈레반 조직원 한 명이 전멸했고, 또 다른 한 명은 사상자를 냈다. 파슈물, 파니웨이 동부 지역의 탈레반 단체들은 전투가 사그라들던 7월 12일까지 철수해야 했다.
다음 날 캐나다군은 휴어드 작전을 지원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휴어드 작전은 헬만드의 상긴에서 탈리반을 철수시키기 위한 완전한 여단의 노력이었다. 캐나다인들은 상인 지구 센터에 포위된 영국군 병사들을 구제하는 임무를 맡았고, 동시에 헬만드 하류 상인과 게레스크 지구 전역의 탈레반 지휘부와 통제를 압박하는 동시에, 매일 수십 명의 탈레반 사상자와 함께 여러 차례의 총격전이 벌어졌지만, 캐나다인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7월 17일, 오리온 태스크 포스는 나와의 점령된 마을을 7월 18일 격렬한 전투 끝에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헬만드에 일주일 더 머물렀다. 이러한 모든 작전은 판즈와이 지역의 캐나다 작전에 영향을 미쳤다. 캐나다인들은 세 개의 미국 특수부대의 도움을 받았다.[1]
B사는 오리온 태스크포스(TF)가 헬만드에 있는 동안 판즈웨이에서 영업을 계속했다. 대책본부는 8월 2일 판자위시에서 다시 연합작전을 시작했고, 8월 3일 파슈물에서 다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캐나다인 4명이 숨지고 11명이 부상했다. 이 전투는 수많은 캐나다 인들이 용맹의 메달과 디스패치에서 언급된 훈장을 획득하는 결과를 낳았다. 윌리엄 맥도날드 병장은 '군용 발레의 별'을, 8월 3일 사망한 병사 중 한 명인 Cpl Bryce Keller는 '군용 발레의 메달'을 받았다. 이는 캐나다 역사상 최초로 사후적으로 메달이 수여된 것이다. 본 잉그램 병장, 크리스토퍼 리드 병장, 케빈 달라이어 병장은 모두 사후에 디스패치 장식에 언급된 것을 받았다. 이번 전투에서 3명의 지휘관을 포함한 90명의 탈레반이 사망하고 부상했다. 이 조치는 탈레반이 8월에 칸다하르 시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체포했다. 대신 8월 19일(아프간 독립기념일) 판자위 구립 센터를 공격했다. 아프간인들과 A사 2PCLI 소속 군인들의 거친 방어전이 적을 저지해 최대 70명의 탈레반 사상자를 냈다. 그 후 9월에 싸움이 재개되기 전까지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다.
제2차 판즈와이 전투 - 메두사 작전
7월 전투 이후 캐나다군과 아프간군은 판즈와이 지역을 떠났고, 판자와이 지역은 탈레반의 거점이자 탈레반이 다시 버려진 지역으로 밀려들자 칸다하르 지방의 캐나다군 편에 가시가 되었다. 9월 초에는 판즈와이 지역에서 다시 훨씬 더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작전의 선봉은 캐나다인들이었다. 캐나다군은 첫날 전략적으로 탈레반을 포위하고 중포와 공습을 요청하면서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둘째 날, 캐나다군의 중대 규모의 요소들이 탈레반에 직접 도전하기 위해 입주했다. 두 번의 공격으로 네 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3명은 탈레반 진지를 공격하던 중 사망했고 1명은 폭탄테러로 사망했다. 다음날은 또 다른 치명적인 날이었습니다. 미국 A-10이 탈레반과 싸우던 중 공중 지원을 요청했던 캐나다군을 실수로 공격해 캐나다 군인이 사망하고 3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후 몇 주 동안 매일 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전통적인 참호 방식으로 전투를 시작한 탈레반은 전장에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 후 캐나다군이 우위를 점할 때까지 캐나다군은 산발적인 저항에 직면했다. 재건 노력이 즉시 시작되었고 탈레반 전사들의 작은 세포들은 자살과 도로변 폭탄이라는 치명적인 전술로 돌아왔다.
판즈와이로 가는 길
메두사 작전의 주요 전투 작전이 중단된 후 재건 작업이 시작되었다. 특히 한 가지 프로젝트는 지역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한 치명적이고 위험한 노력이 되었다. 캐나다군은 판자와이 지역에서 칸다하르 시를 포함한 외곽 지역으로 암호명 '섬미트'로 명명된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도로는 포장도로를 달리 어렵고 폐쇄적인 지형에 제공함으로써 지역의 보안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더 나아가 그 길은 그 지역에 대한 접근을 훨씬 더 쉽게 함으로써 지역 경제가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도로를 건설하던 기술자들을 겨냥한 도로변 폭탄과 부비트랩, 매복공격으로 캐나다인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도로는 결국 현지 농부들에게 기존의 관개 시스템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여졌고, 캐나다 군대의 많은 작업이 도로 건설로 인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10월 3일 병장. 크레이그 길람과 Cpl. 로버트 미첼은 탈레반이 그 지역에 설치된 감시초소를 매복공격했을 때 사망했다. 아프가니스탄에 복무하는 캐나다 군인들은 병장의 빠른 생각이 그렇게 말했다. 길람은 공격 중에 더 많은 캐나다인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1월 21일, 캐나다 군인 2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그 중 1명은 대인 지뢰가 발동되었다. 가장 중상을 입은 병사는 독일 랜드스툴 지방의료원으로 공수되어 하체에 상처를 입었으며, 이는 매우 심각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분류되었다. 새로 심은 갱도인지, 아니면 최근 폭우로 수면 위로 떠오른 노후 갱도인지 알 수 없다.
민간인 통행료
![]() | 이 구간은 민간인 사상자의 규모와 심각성에 대해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2017년 4월) 은 를 하십시오 |
판즈와이 전투는 민간인 사상자의 측면에서 매우 가벼웠다.[specify] 많은 민간인들이 캐나다와 아프간 군대가 들어오기 전에 그 지역을 떠났다. 메두사 작전 중 전투는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의 전투보다 더 재래식(예: 참호, "거미 구멍")이었고, 민간인들은 대부분 전투 구역 밖으로 대피했다. 이로 인해 탈레반은 민간인 소유의 가옥을 은신처로 사용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여러 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지난 10월 말, 이 지역에서 작전 중인 영국 부대가 탈레반 무장세력에 대한 공습을 요청했고 나토 전투기가 공격을 받았다. 이 폭탄으로 6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탈레반 전사들은 이 폭탄의 대부분이 나토가 의도적으로 표적으로 삼은 민간인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아프가니스탄의 NATO 사령관에 의해 논란이 되었는데, 나토 사령관은 그 현장을 잠깐 조사한 후 사망자의 대다수가 사실 탈레반 전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NATO는 이번 공격으로 다수의 민간인이 사망했음을 확인하고 신속하게 사망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포스트 메두사 판자와이
메두사 작전의 전투가 끝난 후, 탈레반은 더 이상 그 지역에 있지 않았지만 여전히 캐나다군에 대한 공격은 꽤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일부 총격전은 물론 모르타르와 폭탄 공격도 탈레반이 더 이상 대규모로 무장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위협임을 극명하게 일깨워 주었다. 11월에 있었던 폭탄 테러는 그 지역에서 캐나다인 2명과 미국인 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2월 2일 메두사 작전 당시 증원군으로 투입된 캐나다 레오파드 C2 전차 1개 중대가 칸다하르 비행장을 출발해 판와이 지구의 캐나다 전진 작전기지로 진격했다. 캐나다 탱크는 1980년대 소련이 전투한 이후 판자위 지역에서 목격된 가장 무거운 장비다. 전진 작전 기지에 배치된 다음날, 한국 전쟁 이후 전투 구역에 있는 캐나다 탱크의 첫 번째 발포가 발사되었다. 탈레반 전사들은 로켓으로 캐나다 기지를 공격했고 레오파드 전차의 대포를 신속하게 받았다.
팰컨 서밋 작전
팰컨 서밋 작전은 2006년 12월 15일 나토군의 공습으로 탈레반 사령부가 공격받은 다음날 오전 영국, 캐나다, 덴마크, 에스토니아군이 판자위 지구에서 대규모 집결을 시작하자 시작됐다. 이번 작전은 메두사 작전 때 모아진 기세를 이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첫 번째 작전 관련 사상자는 캐나다 군인으로, 작전 중과 후에 일어날 재건을 논의하기 위해 부족 원로들과의 회의에 가던 중 지뢰를 밟았다. 로얄 22e 레기멘트의 프레데릭 쿠튀르 일병은 이번 폭발로 중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부상을 입었다. 지뢰는 전날 밤 캐나다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숨진 탈레반군에 의해 심겨진 뒤 이 지역의 지뢰를 모두 제거하려 했다.
12월 19일, 이 지역의 캐나다군은 작전 지역의 탈레반 진지에 대한 대규모 포병과 탱크 공격을 시작했다. 캐나다 레오파드 전차, M777 호위츠, 중기관총이 탄압이 끝나기 45분 전부터 탈레반 진지를 향해 사격을 가했고, 캐나다 지상군이 전진해 호우즈-에 마다드 마을 주변을 사격도 하지 않고 경계선을 확보했다.
메모들
참조
- 72 탈레반이 캐나다에서 설정한 군사 덫에 걸려 살해됨 – 내셔널 포스트 (2006년 8월 21일)
- 칸다하르 CBC뉴스 서쪽(2006년 9월 2일)에서 탈레반에 대한 NATO 공세가 시작된다.
- 캐나다군은 판자와이 전투 www.ctv.ca (2006년 9월 11일)에서 진척되고 있다.
- cdn 탱크 50년 만에 첫 교전 www.ctv.ca(2006년 1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