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버클리

Daniel Buckley
대니얼 버클리
Daniel Buckley.jpg
태어난
대니얼 버클리 주니어

(1890-09-28)1890년 9월 28일
보어부, 코르크, 아일랜드
죽은1918년 10월 15일 (1918-10-15) (28세)
상위 항목대니얼 버클리, 시니어
애비게일 설리번

다니엘 버클리 일병(Daniel Buckley, 1890년 9월 28일 ~ 1918년 10월 15일)은 아일랜드 태생의 승객으로 1912년 4월 15일 발생한 RMS 타이타닉호 침몰사고의 생존자 중 한 명이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으로 복무하다가 전사했다.

전기

다니엘 버클리 주니어(Daniel Buckley Jr. Sr. Daniel Buckley)는 마을의 제빵사인 Sr. Daniel Buckley(b. 1863년)와 코르크보헤르뷔의 아비가일 오설리반(b. 1865년)의 아들이었다.[1][2] 그의 아버지는 1902년 11월 22일에 사망하였고 가족은 발리데스몬드(당시 킹윌리엄스타운)로 이주하였다. 미국은 풍요의 땅이었기 때문에 비록 삼류(스티어링)에 속하긴 했지만,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여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07년 9월 14일 그의 여동생 캐서린과 이복동생 제인 메리 오설리반이 RMS 루카니아호를 타고 뉴욕으로 항해하여 가정부로 고용되었기 때문에 그의 두 남매는 이미 그것을 시험했다. 다니엘은 미국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3]

1912년까지, 그는 RMS 타이타닉호를 처녀로 선적할 당시 대서양 횡단 긴 항해를 하기 위해 사촌들과 친구들로 구성된 그룹을 조직했다.

버클리는 배의 뱃머리 근처에 있는 3등 선실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배가 빙산에 부딪혔을 때 추락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비록 그의 벙커메이트들이 처음에는 그것이 심각하다고 믿지 않았지만, 불을 켜자 그들은 바닥에 발목까지 차 있는 바닷물을 볼 수 있었다. 버클리는 보트 갑판으로 올라가서 잠긴 대문을 억지로 통과시킨 조타수 일행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안전벨트를 잊어버리고 일등석 승객이 두 개의 구명벨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니엘은 스페어를 달라고 했고 그 남자는 그것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다니엘은 구명보트 역으로 올라갔다. 그는 여성과 아이들을 적어도 다섯 척의 구명정에 태우는 데 도움이 되도록 스스로 유용하게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그가 구명보트 옆에 서 있을 때 몇몇 남자들이 구명보트를 타고 뛰어내렸다. 다니엘은 그들과 함께 뛰어들기로 빠른 결정을 내렸다. 두 명의 경관이 총구를 겨누고 그 남자들에게 나가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버클리는 울기 시작했고 한 여성 승객이 그를 불쌍히 여겼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그를 여자로 위장하기 위해 그의 머리 위로 숄을 던졌다. 그녀는 그를 배 밑바닥(보트 13호)에 숨기기 위해 밀쳐 내려왔다. 단지 그가 여자로 변장했다는 이유만으로 탈출했다.[3] 그는 그의 구세주가 마들린 아스토르라고 믿었지만, 역사 기록에 따르면, 아스토르 부인은 (4번 보트에) 타고 있었다.

타이타닉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1912년 5월 3일, 버클리는 이 배의 침몰에 대한 조사의 일환으로 미국 상원의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3] 윌리엄 앨든 스미스 상원의원의 질문에, 버클리의 증언은 증언하기 위해 전화한 몇 안 되는 3등석 승객 중 한 명으로서, 조타수 승객의 독특한 관점을 제공했다. 수십 년 후, 그의 증언은 영화제작자 제임스 카메론의 1997년 블록버스터 영화 타이타닉의 몇 장면의 조향 장면을 형성하는데 특히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 무사히 도착한 뒤 다니엘은 맨해튼에 정착해 호텔에서 일했다.[4]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지 두 달 뒤인 1917년 6월, 는 미 육군에 입대했다. 그는 다른 많은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포함된 69 보병 연대에 배치되었다. 롱아일랜드캠프 밀스에서 기초 훈련을 받은 버클리는 1917년 가을, 미국 원정군(AEF)의 첫 병사들 가운데 165보병연대(제69연대가 재건한)의 'K사'와 함께 서부전선을 타고 프랑스에 도착했다. 1918년 3월 21일 경상을 입었다. 전쟁을 종식시킨 독일과의 휴전 직전인 1918년 10월 15일, 버클리는 무세 아르곤 공세로 부상당한 병사들을 구출하는 것을 돕다가 저격수에 의해 전사했다. 그는 처음에 프랑스에 묻혔지만 1919년 봄에 그의 유해가 아일랜드로 옮겨졌다.[5]

버클리는 또한 아일랜드 문스터의 슬리브 루아흐라 지역에서 인기 있는 민요인 스위트 킹윌리엄스타운을 작곡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2]

참조

  1. ^ "Dan Buckley Titanic Survivor". www.boherbue.com. Retrieved 14 November 2019.
  2. ^ Jump up to: a b "Faces of the Titanic: Daniel Buckley survived by hiding in a lifeboat". IrishCentral.com. 11 April 2018. Retrieved 14 November 2019.
  3. ^ Jump up to: a b c "TIP United States Senate Inquiry Day 13 Testimony of Daniel Buckley (Third Class Passenger, SS Titanic)". www.titanicinquiry.org. Retrieved 14 November 2019.
  4. ^ Compton, Nic. "Extract: 'They tried to keep us down on the steerage deck as Titanic sank'". TheJournal.ie. Retrieved 14 November 2019.
  5. ^ "PVT Daniel "Dannie" Buckley, Jr". Find A Grave. Retrieved 14 November 2019.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