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아미 비행장
Gray Army Airfield그레이 아미 비행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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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지 루이스-맥코드의 일부 | |||||||
미국 워싱턴 레이크우드 인근 | |||||||
좌표 | 47°04′45″N 122°34′51″w / 47.07917°N 122.58083°W좌표: 47°04′45″N 122°34′51″W / 47.07917°N 122.58083°W/ . | ||||||
유형 | 육군비행장 | ||||||
사이트 정보 | |||||||
주인님. | 국방부 | ||||||
연산자 | 미군 | ||||||
제어 대상 | IMCOM(미 육군 설치 관리 사령부) | ||||||
조건 | 운영 | ||||||
사이트 기록 | |||||||
빌드됨 | 1921 | ||||||
사용중 | 1921 – 현재 | ||||||
비행장 정보 | |||||||
식별자 | IATA: GRF, ICAO: KGRF, FAA LID: GRF, WMO: 742070 | ||||||
표고 | 91.44m(300ft) AMS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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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방 항공국[1] |
그레이 아미 비행장(IATA: GRF, ICAO: KGRF, FAA LID: GRF)은 그레이 AAF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미국 워싱턴 주 피어스 카운티의 타코마 인근 공동 기지 루이스-매코드(구 포트 루이스) 내에 위치한 군용 비행장이다.[1]
개요
포트 루이스의 지원을 위해 사용되었던 육군 헬리콥터는 1970년대에 레이니어 산 국립공원에서 여러 차례 의료 대피를 도왔다. 육군 헬리콥터도 산 동쪽, 북쪽, 서쪽 접근 불가능한 지역에 수색 구조대[SAR]를 투입하여 '정글 침투기'로 알려진 케이블 장치에 의해 감시대를 지상으로 낮추었다. 헬리콥터는 1980년대에 고고도(1만 피트 이상) SAR 작전에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헬리콥터는 또한 헬리콥터 아래에 있는 슬링으로 사고 현장까지 경비원과 쓰레기를 운반하는 "단거리" 구조작업에도 사용되었다.
- 제1공격정찰대대대, 제229항공연대(AH-64E)[2]의 요소
워싱턴 육군 66기무대 항공사령부는 그레이 AAF에서 훈련하고 산불 진압을 위한 수송 지원을 한다.[citation needed]
역사
이 들판은 호손 C 선장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1927년 11월 4일 일리노이주 벨빌의 스콧 필드에서 출발한 자유풍선 비행 중 목숨을 잃은 그레이. 그레이 선장 (1889–1927)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병으로 복무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풍선과 비행 학교를 다니며 임무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육군항공대와 비행학교에 입사하여 시험 비행을 했다. 그레이 선장은 성층권 비행의 선구자가 되어 첫 비행에서 29,000피트의 미국 고도 기록을 세웠다. 그는 산소 결핍으로 사망한 11월의 치명적인 비행에서 42,000피트를 포함하여 높은 높이에 도달했다.
오리진스
1921년 10월, 커티스 JN-4 "제니" 2기가 샌드 포인트(시애틀)의 해군기지에서 오늘날의 그레이 AAF의 바로 서쪽에 위치한 "캠프 루이스"라고 불리던 곳에 있는 잔디 비행장으로 날아갔다. 1922년 원시적인 들판은 강철 격납고인 한가르 넘버 1의 건립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캠프 루이스 필드는 샌드 포인트에서 해군 항공과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둘 다 이 지역의 1차 군용 비행장이 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캠프 루이스의 지지자들은 그것이 주요 비행선 및 고정익 분야라고 주장했다. 그 방향의 진보는 1923년 계류 마스트가 세워지면서 일어났다. 캠프의 북쪽에 위치한 이 돛대는 도착하는 비행선을 정박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1924년 5월 17일, 1만 5천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USS Shenandah(ZR-1)는 이곳에 묶였다. 셰난도아는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지연에 이어 1924년 10월 18일 저녁 시간에 묶여 두 번째 방문을 했다. 다음날 정오에 해군 비행선은 샌디에이고로 출발하여 40시간 후에 도착했다. Shenandoah호는 캠프 루이스호를 방문한 유일한 비행선이었다. 안개와 구름 덮개 문제가 있는 기상 조건은 다른 착륙 지점을 선호했다.
1926년, 해외 진출을 참관한 전쟁부는 추가 항공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의회는 육군 항공 서비스를 2200명의 전투기에 도입하고 항공 승무원의 수를 늘리는 5개년 계획에 대한 법안을 제출했다. 캠프 루이스는 1927년에 제2 격납고를 짓기 위한 기금을 받았다. 또한 그해 9월 13일, 유명한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는 공격을 모의 실험하는 훈련장(오늘날 왓킨스 퍼레이드 그라운드)을 낮게 통과했다. 이러한 공군력 시연은 보병 지원에서 비행기의 사용을 장려했다. 새로운 비행장 건설은 캠프 영속성을 부여한 보다 큰 영구적인 건설과 포트 루이스의 새로운 지명의 일부였다.
포트 루이스 비행장은 관측기를 수용했다. 통신 빌딩과 사진 빌딩은 1933년에 완공되었다. 1933년 10월 86관측대대가 3대의 비행기와 함께 도착했다. 제91관측대대는 1936년 6월 제86단을 7기 편대로 대체했다. 이때 사진 코너도 추가됐다. 이러한 대규모 확장은 1938년 4월에 새로운 활주로와 건물을 건설하기 위한 공공사업관리 프로젝트와 함께 이루어졌다.
1938년 건설에는 포장된 활주로 2개(길이 6,175피트, 길이 2,300피트인 동서활주로), 보일러 공장, 본사 건물, 금속 풍선 격납고, 6면 격납고, 골판철 격납고, 창고, 비행기-수술실, 필름 보관소 건물 등이 포함되었다. 이 금속 풍선 격납고는 1921년 5월부터 워싱턴 포트 케이시에서 사용되었다. 노동자들은 격납고를 분해하여 트럭에 싣고 같은 노동자들이 구조물을 재조립한 포트 루이스로 차를 몰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포트 루이스 비행장 밖으로 제91관측대대와 제3풍선대대의 항공기가 운항했다. 그들은 적의 진지를 관찰하고 사단을 지원하는 훈련을 했다. 포트 루이스 필드는 1938년 4월 12일 그레이 아미 비행장으로 개칭되었다. 1940년 동안 제91관측비행단이 출발하고 0-47관측기를 비행하는 제116관측비행단이 입주하였다. 116기는 1940년에 가동된 워싱턴 국가방위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그레이 아미 비행장은 신형 격납고 및 시설 개선 비용으로 170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전쟁이 다가오자 지상군으로 훈련된 그레이 AAF 부대가 다가왔다. GAAF 116 관측기와 116 사진 비행대대는 O-47, O-49 등 6대의 관측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116기는 대잠초계기를 날렸다. 대잠초계기에 합류한 것은 오리건 주 방위군으로부터 기동된 123d 관측대였다. BC-1과 O-46 관측기를 탑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통조림 건설은 1941년 이전 건물의 일부를 철거하는 것을 포함한다. GAAF 상점과 지원 건물들을 철거하여 이 들판의 남서쪽 모퉁이였던 곳에 임시 목조 막사를 둘 공간을 만들었다. 초기 격납고 2동과 주 활주로를 따라 서포트 빌딩이 여전히 사용 중이다. 오늘날 3063빌딩인 새로운 격납고 하나가 1942년에 완공되었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물이며 비행장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제2차 세계 대전 격납고 주변에 새로운 콘크리트 앞치마가 추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컨트롤 타워는 들판의 서쪽에 앉았다; 오늘날에는 개선된 탑이 동쪽에 서 있다.
항공 교통 사령부. 4131 육군 공군 기지 부대는 Fairbanks 인근 엘멘도르프 필드의 11번째 공군 부대에 보급품, 장비 및 항공기를 수송하며 알스칸 서부 해안 윙의 CONUS 허브로 GAAF를 사용했다. 항공 기술 서비스 사령부가 항공기 정비 및 보급 창구로 사용함. 주로 알래스카로 수송되는 항공기에 사용함
전후 시대
육군 공군은 1947년에 시설을 폐쇄했다. 관할구역은 포트 루이스의 관측 및 연락 항공기를 위해 육군부서로 이관되었다. 전쟁에 이어 그레이 육군 비행장에는 2d 보병사단 항공자산과 관측기, 지원항공기가 입주했다. 2d사단은 한국전쟁 때까지 포트 루이스에서 복무했다. 전쟁 기간 동안 GAAF 활동은 제한적이었다. GAAF 항공기는 기동훈련과 훈련에 참가했다.
냉전
한국 전쟁 동안, GAAF는 훈련과 분단 지원 분야로서의 역할을 계속하였다. 현장에는 L-19 버드독과 다른 관측기가 보였다. L-19는 3,000개 이상이 생산되어 비행이 쉽고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조종사들은 포사격과 보병 이동을 지휘하는 FAC(Forward Air Controller) 역할을 위해 L-19에서 훈련을 받았다. 2d사단은 1949년 초 헬기 시험을 시작해 이곳에 9대를 배치했다. 1950년 11월 22일, 2d 항공 회사는 한국전쟁에 헬기인 H-13 수스를 도입했다. 8055 기동군 외과병원(MASH)에 딸린 헬기는 부상자를 이송했다.
625전쟁 이후 국내 최초 헬기부대였던 2d보병사단 2d항공사는 관측·스팟터 항공기 L-19버드독스, L-20비버스와 함께 H-23 레이븐 헬기를 싣고 포트루이스로 돌아왔다. 다시 GAAF는 분할 항공 자산을 지원했다. 제4보병사단은 1956년 항공부대를 이끌고 포트루이스에 왔다.
GAAF는 베트남 전쟁 당시 헬기 부대뿐만 아니라 고정익 항공기 부대도 훈련시켰다. 1966년 9월 15일 이곳에서 244 항공 회사(연방 감시)가 가동된 고정익 부대 1곳이다. 244호기는 '적을 찾아라'는 임무를 띠고 OV-1 모호크 항공기를 띄웠다.
베트남에서 후속 서비스를 재개한 9사단 항공부대는 1972년 GAAF를 점령했다. 사단 자체가 1972년 5월 26일 야전에서 하루 동안 재활성화식을 가졌다.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육군참모총장(1914~2005)이 참석했다. 이 행사에는 비행별, 전술적 공습 전시, 공중폭격을 시연하는 헬리콥터, 헬리콥터에서 발사되는 군인들이 포함되었다.
1980년대 제9기병여단(공습)은 베트남에서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AH-1 코브라 헬기로 공중급습 전략을 개발했다. 그들은 근접 사격 지원을 위해 로켓, 총, 수류탄 발사대를 갖추고 있었다. 후기 베트남 공군 지원 보병이 GAAF 작전을 장악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비 격납고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새로운 지원 시설이 필요했다. 1981년 2월에 새로운 운영 센터가 문을 열었다. 1985년과 1988년 사이에 3개의 격납고가 건설되었다.
1984년 8월 GAAF는 UH-60 블랙호크 헬리콥터의 몇 안 되는 테스트 센터 중 하나가 되었다. 블랙호크는 코네티컷 공장에서 미국 전역을 경유했다. 14명으로 구성된 초창기 그룹은 1주일이 걸리는 크로스컨트리 트레킹을 28시간의 비행 시간으로 만들었다.
근대
1990년대 동안 GAAF에 근무한 항공부대는 C회사 214 항공연대(15CH-47), 54 의료분대(7 HU-1VH), 포트루이스 비행분대(2C-12s, 4 Uh-1Hs) 등 3개였다. 이들 부대는 연간 총 5000~7000시간을 비행했다. 54기 의료분대는 훈련은 물론 실제 의료 대피 비행을 했다. 이 전투부대는 또한 소방, 지역 재난 구호, 그리고 다른 지원 임무들을 도왔다.
또 다른 혁신적인 항공기가 2000년 가을 GAAF에 들어왔다. 제14기병대대대대대인 D-Troop은 무인항공기(UAV) 비행을 도입했다. 기병 병사들은 무인정찰기를 조종하는 법을 배웠고 무인정찰기와 공격 잠재력을 배웠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UAV는 중요하고 효과적인 도구가 되었다.
GAAF 부대는 2004년 4월 17일 159 항공연대의 A사와 함께 이라크에서 복무했다. 이라크 발라드에서 근무하면서, CH-47 치누크와 함께 수송과 보급 임무를 수행했다. UH-60 블랙호크를 보유한 제4중대 제6기병대는 최근 이라크에서 보병부대를 지원했다. 지난 2007년 7월 4일 이라크에서 자신의 OH-58 키오와 관측헬기 추락사고로 4일 스콧 오스웰 영장전담부장관이 사망했다. 다음 달, 그 부대의 UH-60 블랙호크 중 한 대가 추락하여, 승무원들이 사망했다. 제4중대는 GAAF로 복귀하여 향후 행동을 위한 훈련을 재개했다.
2005년 이후로 그 분야는 또 다른 큰 확장을 경험하고 있다. 여기에는 2006년 7월 16일 특수작전항공대대의 활성화가 포함된다. 이 대대는 MH-47 치누크 헬기와 MH-60 블랙호크 헬기를 갖추고 있다. 특수작전부대를 위해 새로운 단지가 건설되었다.
F사 2대대대, 135 일반지원항공대대(구 A사, 5대대대, 159 항공연대(1996~2008) & B사 1대대, 214 일반지원항공대대(2008~2016년)가 고고도 탐색구조 작전을 펼친다. 합동기지 루이스-맥코드의 회색 육군 비행장에 본부를 둔 육군 예비군 항공부대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긴급 수색구조팀을 산악지대로 왕복 수송한다. 이 회사는 1998년 7월 SAR 임무를 물려받았는데, 당시 이 임무를 맡은 현역-육군 부대가 불활성화되었다. 클라이밍 시즌을 전후해 정규 훈련을 하는 동안 부대 소속 CH-47 치누크 헬기는 산기슭 근처의 코츠 크릭으로 날아가 SAR 팀을 태운다. 그리고 나서, 이 결합된 그룹은 해발 14,410피트의 정상에서 약 10,000피트에서 정상까지의 장소에서 삽입과 추출 훈련을 수행한다. SAR 미션은 다양하다. F사는 산 동남쪽에서 실종된 스노보더 수색에 참여했다. 악천후와 짙은 구름 커버에 방해받아, 치누크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SAR 팀들을 수송하고 수색 패턴, 작업 경로, 크레바스, 그리고 스노우보더가 있을 수 있는 나무 선들을 비행하면서 임무는 며칠로 연장되었다. 희생자는 발견되지 않았어 또 다른 임무는 13,000피트 상공에서 리버티 리지 빙벽을 오르는 동안 중요한 장비를 잃은 두 명의 등산가들을 포함했다. 그들은 휴대폰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첫 번째 치누크 정렬기는 강렬한 스콜 라인에 의해 거절당했고, 추가 비행편이 내려지고 나중에 구조대를 태워야 했다.[citation needed]
시설.
그레이 아미 비행장은 평균 해발 300피트(91m)의 고도에 있다. 15/33으로 지정된 1개의 활주로가 있으며, 아스팔트 표면은 가로 6,125 x 세로 150피트(1,867 x 46m)이다.[1]
참고 항목
참조
이 기사는 공군역사연구기관 웹사이트 http://www.afhra.af.mil/의 공공 도메인 자료를 통합하고 있다.
- ^ a b c FAA 공항 양식 5010(GRF PDF용) 연방 항공국 2012년 11월 15일 발효.
- ^ AirForces Monthly. Stamford, Lincolnshire, England: Key Publishing Ltd. October 2020. p. 18.
외부 링크
- 그레이 아미 비행장(GlobalSecurity.org
- FAA 공항 다이어그램(PDF), 2021년 11월 4일 발효
- FAA GRF 터미널 절차, 2021년 11월 4일 발효
- 이 미군 공항의 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