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포위 공격

Pusan Perimeter offensive
부산 포위 공격
한국전쟁의 일부
Pusan Perimeter breakout.gif
부산 주변 경계선 이탈 지도
날짜1950년 9월 16-22일
위치
결과 국제 연합의 승리
호전성

국제 연합

북한
지휘관과 지도자
United Nations 더글러스 맥아더
United States 월턴 워커
United States 프랭크 밀번
South Korea 정일권
South Korea 신성모
United States 얼 E. 파트리지
North Korea최용근
North Korea김책
North Korea 김웅
North Korea 김무종
관련 단위

United States 8군

South Korea 대한민국 육군

United States 제5공군

North Korea 조선인민군

140,000 70,000

부산 방어선 공격은 1950년 9월 16일 시작된 유엔군사령부북한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었다.

전진하는 북한 주민들에 의해 거듭 패배한 유엔군부산항을 포함한 한반도 동남부 끝 지역 주변 140마일(230km)의 방어선인 '부산 경계선'으로 되돌아갔다. 남한미국(미국)의 병력으로 주로 구성된 유엔군은 이 둘레에 마지막 기지를 설치, 대구마산, 포항낙통강 일대에서 교전하면서 6주 동안 반복되는 북한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 북한의 대규모 공격은 8월과 9월에 두 차례나 강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을 경계선에서 더 멀리 후퇴시키는 데 실패했다. 9월 15일 인천에서 유엔의 반격에 이어 9월 16일 부산 방어선 내에 있는 유엔군이 북한 주민들을 몰아내고 인천에서 유엔군과 연계시키기 위한 공세를 펼쳤다.

배경

인천상륙작전은 미 X군단조선인민군(KPA) 후방에 배치했다. 동시에, 미 8군은 KPA의 주요 전투력을 고정시키고 그의 후방 위협 지역을 강화하기 위해 부산 방어선에서 부대의 이동을 막기 위해 전방에서 총공격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이번 공격은 또한 축소되고 있는 부산 방어선 내에서 6주 동안 8군을 보유했던 한국 공군의 경계선을 뚫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만약 8군단이 저지선을 뚫는 데 성공한다면, 서울 지역에 있는 X군단과의 연계를 위해 북쪽으로 운전하는 것이었다.[1]: 542 [2]: 149

계획

8군단은 9월 6일 공격 계획을 발표했고, 다음날 도쿄로 보내 승인을 받았다. 8군단은 9월 11일 이 계획을 수정했고, 16일에는 작전지시를 내렸다. 인천상륙작전 하루 뒤인 9월 16일 09:00으로 유엔군과 한국군(한국군)의 포위 공격 시간을 정했다. 미8군과 한국군은 '태구-쿰촌-대전-수원 축을 따라 지휘하는 현재의 교두보에서' KPA군을 '진격선상' 파괴하고, 'X군단과의 교대'를 실시하기로 했다. 작전지시는 경계선 중앙부에 새로 창설된 US I 군단이 주요 돌파구를 마련하도록 했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러한 개념을 규정하였다. (1) X 군단과의 연결 영역까지의 거리가 주변 다른 곳에서의 거리보다 짧았고, (2) 도로망이 더 우수하고 등급이 더 쉬웠으며, (3) 도로망이 돌파구를 이용할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를 제공했으며, (4) 전진하는 기둥에 대한 공급이 더 쉬워질 것이다. 미 5연대 전투단과 1기병사단왜관 인근 낙통강 상공을 교두보를 점령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어 미 24사단이 강을 건너 금천-태존을 달렸고, 이어 후방과 통신선을 순찰하는 1기병사단이 투입됐다. 이 돌파 시도가 진행되는 동안 육군 좌익에 있는 남쪽에 있는 25·2사단과 동·우익에 있는 한국2·1군단은 KPA 부대를 공격·고치고, 국지적인 돌파구를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 17연대는 물 이동을 위해 부산으로 이동해 인천으로 이동해 X군단에 합류할 예정이었다.[1]:542–3

미2사단과 24사단은 낙통을 가로지르는 교두보 구축이라는 5연대 전투단의 임무를 보완해 왜관 아래 강과 그 위 한국 1사단의 건널목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워커 장군이 이용할 수 있는 엔지니어 부대와 브리징 장비가 몇 번의 빠른 교차로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계획의 실행은 분명 난관에 봉착했다. 8군단은 낙통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폰툰 트레드웨이 다리만을 위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스트라테마이어 제5공군사령관은 인천 작전을 위해 8군 전선에서 탈취한 해병항공대대의 교체를 돕기 위해 제51전투기-인터셉터 윙제16·25전투기-인터셉터 편대의 오키나와 공군 제20기지일본 이타주케 공군기지로 이양했다.[1]: 543

부산 방어선의 상황은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을 중심으로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킬 기회를 주지 못했다. KPA는 주도권을 쥐었고 그들의 공격은 워커가 예상 공격 전날에야 동쪽에서 중앙으로 단편적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미 24사단을 제외한 8군 사령부의 모든 사단을 꼼짝 못하게 했다. 전력 보강이나 기회 없이 위태로운 수비에서 갑자기 공세로 바뀌는 게 문제였다. 연극의 관점에서 볼 때, X 군단이 포장을 하는 동안, 8군단은 포장을 하는 공격을 할 것이다. 대전-수원 축을 따라 X군단과의 신속한 연계가 한반도 서남부에 대규모 북한군을 차단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8군단은 인천상륙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방 북한 주민들에게 사기를 떨어뜨리고 자국군의 정신에도 역효과를 줄 것으로 기대했다. 이 때문에 워커 장군은 인천 상륙 다음 날까지 8군 공격이 시작되지 않도록 요청했었다. 지난 15일 상륙 성공 소식이 한꺼번에 8군단 병력으로 번진 가운데 며칠이 지나서야 8군단 앞에 있는 KPA 병력까지 접근하는 것이 허락된 것으로 보인다.[1]: 543–4

경계에서 이탈할 경우 진격 경로들은 반드시 KPA가 남쪽 드라이브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을 것이다. 경찰 병력이 외곽으로 나가는 모든 도로를 봉쇄했다. 주요 노력의 축은 왜관 맞은편 낙통에서 금촌까지, 소백산맥을 넘어 대전까지 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했다. 두 번째 복도, 북쪽에 있는 낙통 계곡이 상주 지역으로 향할 경우 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 대구타부동 ( )36°02′49″N 128°31′05″E / 36.047°N 128.518°E / 36.047; 128.518)-Sangju road traversed this corridor, with crossings of the Naktong River possible at Sonsan and Naktong-ni (36°21′54″N 128°17′53″E / 36.365°N 128.298°E / 36.365; 128.298). 상주에서 진격선은 대전 상공의 금강 쪽으로 서쪽으로 방향을 틀거나 대전에서 우회하여 수원-서울 지역으로 가는 직항로를 이용할 수 있다. 동쪽 산중부근에서 한국은 안동과 원주를 경유하여 가장 좋은 진격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해안에서는 용독과 원산 쪽으로 해안도로를 곧장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1]:544

극동사령부가 공세에 대비하여 취한 중요한 조치는 8군단 내에 군단 조직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8군단은 연대 및 여단 규모의 4개 보병사단과 기타 부속 지상군을 직접 통제해 왔다. 8월부터는 8군단에 2개 군단을 제공하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8월 2일 포트 브래그에서 존 B 장군과 함께 I 군단이 활성화되었다. 지휘하는 콜터. 11일 후 콜터 장군과 지휘부가 한국에 도착하여 경계선으로부터 탈출을 준비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9월 6일 본대가 한국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파병 부대가 배치되지 않았다. IX 군단은 8월 10일 세리단 요새에서 프랭크 밀번 소장이 지휘하는 가운데 활성화되었다. 밀번 장군과 소수의 참모들은 9월 5일 비행기로 세리던 요새를 출발하여 한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군단 참모진의 주체는 9월 말과 10월 1일이 돼서야 한국에 도착했다. 나 군단과 IX 군단 모두 이전부터 일본의 8군단, 교토에 본부를 두고 24사단과 25사단을 거느린 I군단, 센다이에 본부를 두고 있는 1기병단과 7사단을 거느린 IX군단 소속이었다.[1]: 544

워커 장군은 1군단 산하에 주요 탈주병력을 집결시키기로 결정했었다. 그는 군단 지휘관의 질문에 길고 진지한 생각을 했다. 워커는 결국 9월 11일 밀번 장군을 IX 군단에서 I 군단으로, 콜터 장군은 I 군단에서 IX 군단으로 이동시켰다. 밀번은 그날 대구에서 I군단 지휘를, 콜터는 다음날 밀양에서 IX군단 지휘를 맡았다. 1군단은 9월 13일 12시에 미 1 기병사단, 5연대 전투단, 한국 1사단을 첨부하여 작전이 되었다. 9월 15일과 16일 5연대 전투단과 24사단이 대구 지역으로 이동했고, 9월 16일 저녁 무렵에는 미 24사단 및 1기병사단, 5연대 전투단, 영국 27보병여단, 한국 1사단 및 지원부대를 구성했다.[1]: 544–5

공격 IX 군단의 첫 주 동안은 작전 수행이 되지 않았다. 9월 23일 14:00에 미 25 및 2사단과 그들의 지원 부대에 첨부된 8군 명령에 따라 그렇게 되었다. 따라서 9월 23일까지 이 두 사단은 8군단 지휘하에 직접 운용되었다. 그 지연은 주로 통신 인력과 장비의 심각한 부족 때문이었다. 이 군단을 위한 시그널 대대와 통신장비는 X 군단으로 전용되어 있었다. IX 군단이 작전이 된 후에도 적절한 통신 시설이 부족하여 작전이 지연되었다.[1]: 545

대립군

공격 전날 미 정보당국은 KPA가 1개 기갑사단과 2개 기갑여단의 지원을 받아 13개 보병사단을 전선에 배치했으며, 전방 남쪽에 KPA I군단이 6개 보병사단으로 병력 4만7,417명, 전방 hav의 북부와 동부 절반에 2군단을 배치한 것으로 추정했다.7개 보병사단에 장갑차 지원을 제공, 54,000명의 병력이 투입된다. 이로 인해 근방에는 총 101,417명의 적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KPA 편성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평균 75%의 강도로 추정되었다. 이 추정치는 한국노총이 3개 사단을 부산 방어선에서 서울 지역으로 우회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이 추정치는 "현재 적군은 공격 중에 있으며, 방어선의 모든 일반 부문에서 이 능력을 유지하고 있다. 당장 이런 능력이 떨어질 것으로는 예상되지 않는다." KPA군의 전력과 장비에 관해서도 8군단의 추정치는 너무 높았다. 9월 중순에 8군단이 대치하고 있는 KPA 부대의 전력과 그 장비 상태를 정확하게 진술할 수는 없지만, 전쟁 포로 심문이나 포로로 잡힌 서류들을 보면 8군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KPA 13사단 참모총장, 대령. 이학구는 8군 추산 8,000명 대신 2300명(사단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는 훈련되지 않은 비무장 교체 2000명 포함)으로 그 사단의 힘을 실어줬다. 이때까지 사실상 전멸된 KPA 15사단은 제8군 추산 7천명 대신 흩어지고 흐트러진 병력만 수백명에 지나지 않았다. 또 KPA 5사단은 6,500명 대신 약 5,000명, KPA 7사단은 약 7,600명 대신 약 4,000명으로 줄었다. KPA 1, 2, 3사단은 거의 확실히 9월 중순에 각각 7,000명에서 8,000명 정도의 병력에 접근하기 시작하지 않았다. 9월 상반기에 KPA 손실은 매우 컸다. 아무도 그들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1]: 545–6

9월 중순 경계선에서 8군단이 직면하고 있는 KPA의 힘의 공정한 추정치는 약 7만 명이 될 것이다. 며칠 전, 특히 중무기와 탱크에서 추정했던 75%에 훨씬 못 미치는 KPA는 아마도 원래 장비의 50%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KPA의 사기는 저점에 있었다. 사단의 원래 병력은 30%도 채 남지 않았다. 이들 참전용사들은 신병들에게 기강을 세우려고 노력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남한 출신으로 북한 주민들을 위해 싸울 의사가 전혀 없었다. 퇴역군인들이 명령을 받으면 앞으로 나가기를 꺼리는 모습을 보이거나 탈영하려 하는 사람을 총으로 쏘는 것은 이 시기 공민당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식량이 부족했고, 수감자들의 사기가 저하되는 원인이 영양 부족이라고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남자들은 만약 그들이 항복하면 유엔군이 그들을 죽이고, 그들이 그 시도를 하면 그들의 장교들이 그들을 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거의 탈영도 없었다.[1]: 546

9월 중순 부산 방어선에서 약 7만 명의 KPA 병사와 마주 서 있는 한국 8군 및 한국군 전투 부대의 14만 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총 6만 명 이상의 병력에 평균 1만 5천 명씩 4개 사단으로 구성됐으며, 9,000명 이상의 한국군 병력이 추가되어야 하며, 6개 사단은 평균 약 1만 명씩 총 6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원은 6만 6천 명이다. 3군단 사령부는 최소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추가했으며, 2군단 사령부가 집계되면 총 15만 명 이상이 된다.[1]: 546

공격적

낙통 건너기

9월 16일 아침은 흐린 하늘과 폭우를 동반한 남부 한국 상공에 밝았다.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공군은 왜관 지역의 KPA 위치에 대해 예정되었던 B-29 포화폭격을 취소했다. 09:00으로 설정된 총공격은 많은 장소에서 KPA가 공격하고 UN군이 방어하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지정된 시간대에 경계선 곳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불과 몇 곳에서만 공세 첫날 상당한 이득을 얻었다. 한국 15연대 1사단은 대구 북구 월성시의 KPA 강점 오른쪽으로 진격해 KPA 라인의 침투에 성공했다. 남하한 미 2사단은 치열한 전투 끝에 낙통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까지 5마일(8.0km)을 돌파했다. 첫날의 가장 눈부신 성공은 2사단 구역에서 일어났다. 그곳에서 용산창룡의 서쪽에 있는 2사단은 왼쪽에 9보병연대를, 중앙에 23보병연대를, 오른쪽에 38보병연대를 중심으로 3개 보병연대를 중심으로 3개 보병연대의 공격을 개시했다. 그것의 첫 번째 임무는 KPA 4, 9, 2사단을 낙통으로 다시 몰아가는 것이었다. 좌익 공격은 대한공군이 9보병의 모든 공격에 대해 201고지를 계속 유지하면서 실패했다. 중앙에서는 23보병대인 C사 주변으로 흉악한 KPA 전초공격이 침투해 25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 중에는 중대장교 전원과 부속 중무기 소대 소대장이 포함됐다. 지난 15일 3대대는 1기병사단에 대한 애착에서 연대 통제로 돌아왔고, 앞선 2주간의 중전인 연대장 폴 L 대령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리먼 주니어는 23 보병 구역의 주공격력을 할당했다. 지난 16일 새벽 공격이 격퇴된 후, R. G. 쉐라드 중령은 제72전차사의 C사를 지원하여 공격 10:00에 3대대를 출동시키라고 명령했다. KPA의 저항은 북한 주민들이 그들의 자리를 비우고 낙통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을 때쯤까지 완강하고 효과적이었다. 이 같은 전투의 단절을 이용하기 위해 B배터리와 82대 대공포대대, 23연대 전차대 등으로 구성된 특별 기동대를 편성하여 KPA를 차단하였다. 약 16:00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많은 양의 자동 불길을 가진 이 기동대는 강을 따라 달아나는 많은 수의 KPA를 베어냈다. 오후가 되자 날씨가 맑아졌고 수많은 공습이 대패한 군대의 일부를 거의 전멸시킬 뻔 했다.[1]: 548–50

오른쪽 38보병대는 23보병대를 중심으로 보조를 맞추었다. F-51 4대의 나팔메드, 로켓포, 스트레이드 포병대는 38 보병대 바로 앞에 배치되어 낙통강이 내려다보이는 208 언덕을 점령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오후에 운항하던 전투기들이 창룡 서쪽 강 쪽으로 철수하는 KPA의 대규모 무리를 붙잡아 끈으로 묶었다. 그날 밤 KPA 2사단 지휘소는 강을 건너 철수했고, 이어 4기총연대, 6기총연대, 17기총연대, 사단포병연대 등이 이어졌다. 그들의 건널목은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1]: 550

지난 17일 2사단 앞 낙통 건너편에서 탈출하려던 KPA 장병들이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낮에 전투기는 이 구역의 적에게 110갤런짜리 260여 대의 네이팜탄 탱크를 투하하고 많은 무리를 창룡 서쪽에 늘어놓았다. 도망친 KPA는 많은 양의 장비와 무기를 버렸다. 제23보병은 포병 13개, 대전차포 6개, 박격포 4개를 추격하여 포병 6개, 대전차포 12개, 자주포 1개, 박격포 9개를 포획하였다. 9월 18일 아침 2·3대대의 순찰 중 38보병대가 창룡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푸공리 부근의 낙통을 건너 KPA군이 없는 강 서쪽에 있는 고지대를 발견했다. 페플로 대령, 연대장, 거기서는 중령에게 명령했다. 제임스 H. 스켈던 2대대대장은 2인용 고무보트를 타고 2개 분대를 강 건너에 파견하고, 소대는 따라갈 수 있도록 교두보를 확보했다. 페플로는 즉시 강제적으로 강을 건널 수 있는 권한을 요청했고 13시 20분에는 1개 대대를 강을 건널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16:00 이전에, E와 F 컴퍼니와 G 컴퍼니의 일부는 폭 91m, 깊이 12피트(3.7m)의 전류를 통과했다. 2시간 후 선두 소자는 낙통 서쪽 308 1마일(1.6km)의 언덕을 확보하여 초계(35°33′N 128°15′54″E / 35.559°N 128.265°E / 35.559; 128.265) 도로를 광저항만으로 지배했다. 이 빠른 건널목은 분명히 한국교원회를 놀라게 했다. 308번 힐에서 부대는 서쪽으로 1,000야드 떨어진 곳에 KPA 대대로 추정되는 부대를 관측했다. 그날 저녁 스켈던 대령은 다음날 아침 첫 불이 켜진 지 30분 만에 교두보 지역 상공에 에어커버를 요청했다. 이날 낮 38보병은 132명의 포로를 생포했다. 이 중 32명은 여자 간호사였고, 8명은 장교, 1명은 소령이었다. 모래에 파묻혀 암매장 속에 숨어 있는 동부 제방 건널목 인근에서는 125t이 넘는 탄약과 장비, 그리스로 가득 찬 새 소총 등 대량의 물자와 장비가 발견됐다. 9월 18일 제38보병단이 제2대대에 의한 낙통 건널목은 8군단 어느 부대가든 최초로 영구적으로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으로 이날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건널목은 사단 일정보다 이틀이나 빨랐다.[1]: 550–1

지난 19일 3d대대 38보병대가 일부 전차, 포병, 중격격포와 함께 강을 건넜다. 제3대대는 교두보를 지키는 것이었고, 제2대대는 KPA를 상대로 밀고 나갔다. 지금 강 서쪽에 있는 2개 대대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차량과 중장비를 저쪽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었다. 낙통을 가로지르는 창룡초계간선도로 교각의 파괴된 두 구간은 빨리 보수할 수 없어 제2기술자전투대대는 건널목에서 하류로 떠다니는 다리를 건설할 준비를 했다. 공격 사흘째인 9월 18일까지 미 2사단은 남쪽 201고지와 북쪽 경계를 따라 409고지를 제외한 낙통강 동쪽 구역에서 지상권을 되찾았다. KPA 9사단의 요소들은 반복적인 공습과 포격, 9 보병대의 공격에 맞서 201 힐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북쪽 경계선인 제8군단은 당분간 대규모 409 언덕을 점령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거기서 공습을 하고 포격을 하고, 제38보병단 1대대의 초계작전은 단지 KPA 10사단의 이 병력을 억제하고 무력화시키려 했을 뿐이다. 2사단의 전선 뒤에는 모두 수백 명의 병사들이 모여 강 동쪽 20마일(32km)까지 단절돼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1]: 551

제5연대 전투팀이 왜관을 포획하다.

제5연대 전투단(5 RCT)이 9월 14일 1기병사단에 붙었다. 왜관 6마일(9.7km) 아래 낙통강 동쪽 제방을 따라 대구 서쪽에 있는 집회구역으로 들어가 행동을 준비했다. 9월 16일, 그것은 8군단의 발발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작전을 시작하기 위해 그것의 집결지로부터 출발했다. 2,599명의 인원을 거느린 그 연대는 1,194명이 부족했다. 3개 대대 병력은 586명에서 595명사이에 걸쳐 거의 동등했다. 지난 16일에는 왜관 방면으로 향하는 낙통강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공격하면서 2대대만이 KPA와 교전했으나, 2일째가 되자 3대대가 전투에 참가하고 1대대가 투입되어 진입했다. 다음날인 9월 19일 38보병단이 낙통을 건너자 제5 RCT는 왜관 남동쪽 268 언덕에 대한 본격적인 연대공격을 시작했다. 탱크에 의해 지원된 한국공군 3사단의 1,200명으로 추정되는 병사들이 왜관에 대한 이 남쪽 접근을 방어했다. 그곳의 언덕은 KPA 2 군단의 왼쪽 측면을 구성했다. 만약 북한 주민들이 이 땅을 잃으면 대구 고속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기병연대 5구역의 진격 지위는 방어할 수 없게 된다. 힐 268호선과 관련 포지션의 전술적 중요성은 남쪽과의 KPA 라인의 격차 등을 이유로 더욱 커졌다. 이 틈의 아래쪽에는 영국 제27보병여단이 KPA 10사단의 강력한 병력 바로 위에서 급조한 블로킹 위치를 유지했다. 제5 RCT는 하루종일 치열한 전투에서 북동쪽 비탈을 제외한 268 언덕을 얻었다. 밤이 되자 제3대대는 언덕 위에 있었고, 제1대대는 거기서 북서쪽으로 다른 KPA 위치로 돌았고, 제2대대는 강길을 따라 왜관에서 남쪽으로 1마일(1.6km)밖에 떨어지지 않은 121고지를 점령했다. 한국 공군에 대한 파괴적이고 사기가 저하된 공습은 연대 진격을 내내 방해했다. 낙통 동쪽 둑을 따라 펼쳐지는 이 중요한 행동에서 제5기병연대와 제7기병연대의 일부는 제5 RCT의 오른쪽 측면을 지키고 왜관 동쪽에 인접한 야산에서 전투팀과 조정된 매우 무거운 전투를 벌였다. 그날 저녁 18시, 9월 18일, 5 RCT와 6 중전차 대대는 24사단 통제로 되돌아갔다.[1]: 552–3

다음날 아침 268고지를 향한 전투는 계속되었다. 통나무로 덮인 벙커에 탄 200여 명의 KPA 병사들이 여전히 3대대와 싸웠다. F-51의 세 번의 비행이 정오 직전에 이들 위치를 공격하고, 로켓을 발사하고, 끈으로 묶었다. 이 타격으로 보병은 벙커를 오버런할 수 있었다. KPA 전사자 중에는 연대장이 있었다. 약 250명의 한국 경찰 병사들이 언덕에서 죽었다. 강 쪽으로 서쪽으로 가면서 다른 KPA 부대는 이 전투에서 300여 명의 병력을 잃으면서 2·1개 대대에 격렬히 저항했지만, 제5 RCT는 앞으로 밀고 나갔다. 2대대는 14시 15분에 왜관으로 들어갔다. 15분 후, 그곳은 1대대와 연합했다. 그 앞에 지뢰밭을 깔고 있는 KPA 일당을 놀라게 한 후, 2대대는 왜관 깊숙이 침투하여 15시 30분까지 마을을 통과했다.[1]: 553

9월 19일 왜관 주변의 KPA 3사단 방어가 무너지고 사단은 공황에 휩싸인 채 강을 건너 후퇴하기 시작했다. 09:00에 항공 관측통들은 왜관 바로 북쪽에 있는 낙통 서쪽에 1,500명으로 추정되는 KPA 병력이 건너간다고 보고했고, 오후에는 왜관 북쪽의 도로들이 왜관 10~300명 정도의 다양한 규모의 KPA 군대로 꽉 차 있다고 보고했다. 오후 중반의 관측통들은 왜관 북쪽을 지나갈 때마다 KPA 병사를 보고하였다. 이날 낮 동안 제5 RCT는 45mm 대전차포 22발, 82mm 박격포 10발, 중기관총 6발, 소총과 기관총 250여 발을 포획했다. 9월 20일 오후 2대대가 왜관 북쪽 303고지를 점령했을 때 5 RCT는 낙통강 동쪽의 마지막 목표를 포착했다. 제5 RCT는 목표 달성을 위해 이날 낮 동안 18명의 사망자와 111명의 부상자, 3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그날 저녁 19시 45분 1대대는 왜관 철교 위 1마일(1.6km)의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자정 무렵에는 건널목을 완성하고 서쪽으로 1마일(1.6km) 정도 진격했다. 제2대대는 제1대대를 따라 강을 건너 자정 전에 서쪽을 파고들었다. 낮에 3대대는 왜간에서 북쪽으로 4마일(6.4km) 떨어진 300km 언덕을 점령했다. 다음날인 9월 21일 오후, 제2대대대 제5기병연대가 진지로 진군한 후, 제3대대는 낙통을 건넜다. 제5 RCT는 강 서쪽에서 KPA 탄약과 소총의 대형 저장소를 발견했다. 5일 만에 제5 RCT가 오른쪽 측면 전체와 KPA 3사단의 중앙 일부를 격파했다. 이로써 제5기병연대와의 치열한 전투 속에 갇혀 있던 대구로 향하는 길목에서 사단의 전진 진지를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1]: 553–4

24사단은 낙통 서쪽에 배치한다.

8군단과 1군단의 부산 포위망 이탈 계획은 24사단에 낙통강의 첫 교차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9월 17일 장군 존 H. 교회는 대구 서쪽에 위치한 하산동 여객선(35°535324″N 128°24′14″E / 35.89°N 128.404°E / 35.89; 128.404) 인근에서 건널목을 강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5 RCT는 방금 북쪽으로 지면을 개간하고 강 동쪽에서 KPA의 행동에 대비하여 건널목 지점을 확보했다. 21보병연대9월 18일 새벽 3기병전대 돌격정을 타고 강을 건널 예정이었다. 일단 반대편에 상륙하면 연대는 왜관 맞은편 지점까지 낙통 서쪽 둑을 따라 북쪽으로 공격해 금천으로 가는 간선도로를 타격할 예정이었다. 제24정찰대와 제19보병연대는 동시에 남쪽으로 조금 더 멀리 건너가 강 서쪽 6마일(9.7km) 정도 떨어진 한국공수병집중지점 송주에서 이어지는 도로를 봉쇄할 예정이었다. 더 남쪽인 제2대대대 38보병들이 낮 동안 예기치 않게 낙통을 건넜다고 해서 8군단의 이탈 계획은 달라지지 않았다.[1]: 554–5

낙통으로 올라가면서 24사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아치형으로 뻗어 있는 지류 중 하나인 금호강을 건너야 했다. 18일 오전 제21보병연대장인 스티븐스 대령은 1군단 기술자들이 계획대로 금호타이어를 연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단은 서둘러 자체 기술 부대를 하천으로 급파하고 5 RCT가 이미 사용한 수중 다리를 모래주머니로 만들어 대형 차량이 건널 수 있도록 하기 시작했다. 돌격선으로 건조된 임시 여객선이 금호고속을 가로질러 지프를 이동시켰다. 해저 모래주머니 다리의 지속적인 보수 작업이 필요했다. 해질 무렵에는 금호 동쪽 5마일(8.0km) 지점까지 차량 행렬이 이어져 있어 계획대로 어두워진 그날 저녁 연대가 낙통을 건널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자정이 되어 시간이 흐르자 총교회는 연대가 건너기 전에 해가 저물기 전에 도착하여 결과적으로 많은 사상자를 낼 수도 있는 병력이 노출될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티븐스에게 날이 밝기 전에 낙통을 건너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야간에는 반대쪽 지형에 대비하여 포병 지원 사격을 두 차례 실시하였다. Despite nightlong efforts to break the traffic jam and get the assault boats, troops, and equipment across the Kumho and up to the crossing site, it was 05:30, 19 September, before the first wave of assault boats pushed off into the Naktong. 6 miles (9.7 km) below Waegwan and just south of the village of Kumnan-dong (35°55′16″N 128°24′32″E / 35.92서쪽 1°N 128.409°E / 35.921; 128.409)은 174 힐과 긴 남쪽 손가락 능선이 건널목을 지배했다. 새벽의 탁한 안개 속에서 맞은편 은행에는 KPA의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제1차 파도는 상륙하여 내륙으로 출발하였는데, 거의 동시에 양쪽에서 발사된 KPA 기관총 사격이 부대원들을 십자포화에 휘말리게 하고 그 후 강 양쪽에서 KPA 박격포와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가장 무거운 불은 174고지와 긴 남쪽 손가락 능선에서 나왔다. 한동안 건널목이 성공할지 의심스러웠다. 포화를 받고 건널목을 계속하던 1대대는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약 120명의 사상자를 냈다. 07:00에 공습이 174 힐을 강타했다. 서쪽에서는 1대대가 재편성하여 네이팜과 스트래핑 스트라이크의 지원을 받아 정오까지 174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날 오후 3대대는 강을 건너 북쪽의 다음 언덕을 점령했다. 밤과 이튿날 아침 사이에 제2대대는 낙통을 건넜다. 9월 20일 1대대는 왜관 맞은편 강 서쪽에 있는 고지 170번 힐까지 북쪽으로 진격했고, 3대대는 북서쪽 1마일(1.6km)의 높은 언덕을 점령했다. 한편 21보병교차지점 남쪽 2마일(3.2㎞) 지점인 제19보병사단 2대대는 19일 오후 16시 낙통(낙통)을 건너기 시작해 저녁 무렵 서쪽에 있었다. KPA 박격포와 포탄 사격은 대대가 강 동쪽에 있는 동안 5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일단 강을 건너면 대대는 가벼운 저항만을 만났다. 24사단을 가로지르는 작전에서 기술자들의 역할은 그들의 사상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어렵고 위험한 것이었다. 제3공병대대는 전사자 10명과 한국인 부대원 5명, 미국인 37명, 한국인 10명, 한국인 실종자 5명을 전사시켰다.[1]: 555–6

9월 20일 제19보병대는 송주로를 따라 강 서쪽의 고지대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밤중에 강을 건너온 24정찰대는 19보병대를 지나 송주도로에서 서쪽으로 출발했다. 1군단은 낮 동안 영국 27보병여단을 24보병사단에 배치하고 낙통( nak通)을 넘어 사단 공격에 나설 준비를 했다. 제2대대대 제7기병연대에 의해 위치가 바뀐 영국 제27여단은 19보병 교차로 북쪽으로 이동했고, 정오 직후 기술 부대가 강을 가로질러 던진 구불구불한 도교 위로 한 줄로 건너기 시작했다. 한국 경찰총이 하루 종일 산발적으로 그러나 정확하게 교차 지점을 포격하여 일부 영국인 사상자를 냈고 19연대의 물자 수송을 방해했다. 관측자들은 이 총이 항공기가 머리 위에 있는 동안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9월 20일 24사단과 부속 영국 27여단의 3개 연대가 모두 낙통강을 건너게 되었다. 제5 RCT는 왜관-금천간 고속도로 북쪽에 고지를 잡고 있었는데, 그 남쪽으로는 제21보병단인 왜관-금천간 고속도로의 남쪽으로는 제19보병단이 뒤쪽으로 올라가서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제24정찰단은 그 축에 영국여단이 서쪽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가운데 낙통 서쪽의 송주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사단은 대구-금천-대전-서울 간선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1]: 556

제24사단 전투요소를 강 서쪽에 두고 사단 수송과 포병, 전차, 서비스부대를 건너게 하여 진격을 뒷받침할 필요가 있었다. 8월 초 1기병사단에 의해 파괴된 왜관의 영구교량은 강을 건너는 도보 통행을 허용하기 위해 쓰러진 경간에서 사다리를 제외한 북한 주민들에 의해 수리되지 않았다. 중장비를 실을 수 있는 다리를 한꺼번에 낙통 건너편으로 던져야 했다. 9월 20일부터 36시간 동안 계속하여 11공병대대와 55공병 트레드웨이 브릿지 회사는 9월 22일 10:00에 왜관에 가로 700피트(210m) 깊이와 세로 8피트(2.4m)의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M2 폰툰 플로트 트레드웨이 다리를 완공했다. 교통이 즉시 그 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24사단 차량은 대부분 자정 무렵에 낙통 서쪽에 있었다.[1]: 556–7

9월 20-21일 왜관 부근에서 벌어진 작전에서 대한공군은 탱크뿐 아니라 낙통 양쪽에 있는 다른 장비와 병력에서도 크게 패했다. 이 이틀 동안 24사단은 29개의 KPA 탱크가 파괴되었다고 계산했지만, 그들 중 많은 수가 8월과 9월에 파괴되었다. KPA 소식통에 따르면 105기갑사단 203연대는 전차 9대, 107연대는 전차 14대만으로 낙통 서부로 후퇴했다. 그런데도 한국기원은 탱크, 자주포, 대전차포, 소총 지원 소총 등으로 금천 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엄호했다.[1]: 557

9월 22일, 24사단은 KPA 야전군 사령부인 금천까지 북서쪽으로 32km를 운전하는 것을 목표로 강 서쪽에 집중되었다.[1]: 558

2사단은 서쪽으로 공격한다.

24사단 밑에서 2사단은 9보병연대가 201고지를 점령하기를 기다렸다. 지난 19일에는 한국전력공사(KPA) 거점 축소를 돕기 위한 1·2사단 23보병전투에 투입됐다. 1대대는 201번 힐에서 9군단을 도운 반면 2대대는 9군단을 넘어 관련 KPA 방어 진지인 174번 힐을 상대로 공격했다. 그날 저녁 2사단의 좌익에 있는 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언덕은 9사단의 손에 들려 있었고 2사단의 낙통 건널목을 위한 길이 열려 있었다. In pre-dawn darkness, 20 September, the 3rd Battalion, 23rd Infantry, without opposition slipped across the river in assault boats at the Sangp'o ferry (35°34′12″N 128°21′43″E / 35.57°N 128.362°E / 35.57; 128.362) site, just south of where the Sinban River enters the Naktong from the west. 그 대대는 그 선두적인 요소인 L 사가 KPA 중령과 그의 참모들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포착할 정도로 완전한 놀라움을 달성했다. 이때 포착된 지도에서 미군은 신반리 지역의 KPA 2, 4, 9사단의 위치를 파악했다. 정오가 되자 3대대는 서쪽의 건널목 부지를 지배하고 있는 위급한 지형인 227번 힐을 점령했다. 오후에는 제1대대대인 제23보병대가 강을 건넜다. 그것의 목표는 교차지점에서 상류로 1마일(1.6km) 떨어진 207 언덕이었고 그곳에서 낙통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선두 회사는 곧 신반강을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회사에서는 아무도 그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을 건너는 방법을 찾으려고 몇 시간이나 지체한 후, 부대는 마침내 DUKW를 타고 건넜고, 야간 공격에서 방어되지 않은 언덕 위로 이동했다. 한편, 제3대대는 227번 힐에서 파고들었다. 그날 밤 비가 억수같이 내렸고, 폭풍우를 틈타 북한 사람들 한 무리가 볏가까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9월 21일 아침 L사 남자들이 아침을 먹고 있을 때 한국 경찰청은 언덕 위에서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그들은 1개 소대를 진지에서 몰아내 26명의 사상자를 냈다. 반격은 정오까지 그 자리를 되찾았다. 이 행동이 그 남쪽 언덕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 72 전차대대의 전차 소대를 거느린 제1 대대 23 보병대대는 강 서쪽 5마일(8.0km) 떨어진 KPA 본부 지휘소인 신반리 쪽으로 가는 길을 공격했다. 강력한 KPA 반대에 대한 진격은 탱크와 보병 사이의 비효율적인 조정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쌍둥이-404중-50 자주포 차량을 지원함으로써 얻은 엄청난 양의 화재는 한국군 여러 부대를 우회하는 2.5마일(4.0km) 진격을 가능하게 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1]: 558–9

다음날 아침, KPA 새벽 공격이 B사를 그 자리에서 몰아냈고, 그 회사 사령관을 포함한 많은 사상자를 냈다. 낮 동안 중전 중인 2개 대대로 추정되는 KPA가 신반리 앞에서 23 보병을 견제했다. 제2대대대, 제23보병대는 낙통을 건너 북쪽의 전투에서 제1대대에 합류하기 위해 올라섰다. 그 남쪽의 3대대는 더 가벼운 저항에 직면했다. 다음날인 9월 23일, 23연대는 신반리를 얻었고, 당시 38보병대에 합류하여 협촌에서 집대성 운동을 전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6마일(9.7km) 떨어진 23보병대 북쪽의 다음 도로에서는 38보병대가 초계와 협촌을 향해 공격하면서 강력한 KPA 지연군과 힘겹게 싸웠다. 9월 21일 네이팜과 파편탄으로 공습한 2대대는 초계가 내려다보이는 임계 지형인 239 언덕에서 KPA의 저항을 깨뜨리는 데 일조했다. 다음날 대대는 이른 오후에 읍내로 들어섰다. 자정이 되기 전에 1대대는 낙통 동쪽 409 언덕에 있는 KPA 10사단의 요소를 포함하는 임무를 2대대대인 9보병에게 넘겨주고 강을 건너서 연대에 합류하기 시작했다.[1]: 559–60

9월 22일 오후 2사단은 사등 나루터에서 400피트(120m)의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완성하고, 전진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강 서부로 물자를 옮길 준비를 마쳤다.[1]: 560

대구 위 포위

대구 위와 5 RCT 오른쪽의 호에서는 제1 기병사단과 한국 1사단이 공격과 반격에서 KPA 3, 1사단과 함께 며칠 동안 훈련해 왔다. 9월 16일 부산으로 대피한 373명의 사상자 중, 예를 들어, 거의 200명이 대구 지역에서 왔다는 등 주변지역과 관련된 전투의 강도는 사상자를 통해 명백하다. The fighting centered, as it had for the past month, on two corridors of approach to Taegu: (1) the Waegwan-Taegu highway and railroad, where the 5th Cavalry Regiment blocked the advanced elements of the KPA 3rd Division 5 miles (8.0 km) southeast of Waegwan and 8 miles (13 km) northwest of Taegu; and (2) the Tabu-dong road through the mountains n한국 1기병사단과 한국 1사단의 다른 요소들이 거의 한 달 동안 KPA 13과 1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대구 직구. 그곳에는 대구 그릇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대한 대한체육회가 여전히 있었고 대구에서 북쪽으로 불과 9.7km 떨어진 곳에 있었다.[1]: 560–1

호바트 장군 R. Gay's plan for the 1st Cavalry Division in the Eighth Army breakout effort was: (1) to protect the right flank of the 5th RCT as it drove on Waegwan by having the 5th Cavalry Regiment attack and hold the KPA troops in its zone east of the Waegwan-Taegu highway; (2) to maintain pressure by the 8th Cavalry Regiment on the KPA in the Ch'ilgok area no대구의 r번째, 그리고 타부동으로 북상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준비하고, (3) 제7기병연대는 사단의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동하여 왜관과 타부동 사이의 오솔길과 2차로를 넘어 KPA를 신속하게 포위하기 위해 대비한다. 이 계획이 통하면 제7기병연대와 제8기병연대는 다부동에서 만나 왜관-태구-타부동 삼각지대에 대규모 KPA 부대를 포위하게 된다. 게이 장군은 9월 16일 제2대대대인 제7기병대를 제5기병대 지역의 힐 188으로 이동시킴으로써 병력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1]: 561–2

KPA 13사단 타부동 도로부대의 대구 북부는 8군 공세의 첫 3일 동안 제8기병연대와 교전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어느 쪽도 물질적으로 위치를 개선하지 못했다. KPA는 대구에서 북쪽으로 10마일(16km) 떨어진 산복도에서 동쪽으로 지배적인 높이인 570번 언덕에서 2대대대인 8기병대를 반복적으로 공격했다. 도로 서쪽, 제3대대는 대구에 가까운 높은 언덕에서 제한적으로 이득을 보았다. 타부동 길 양쪽에 있는 KPA는 어느 정도 가공할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언덕의 앞쪽 비탈에는 박격포와 작은 밭 조각들이 대거 파고들었다. 부대 지휘관들이 불과 움직임을 결합할 수 있도록 병력을 처분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은 천천히 가거나 부하들의 생명을 희생해야 했다.[1]: 562

워커 장군은 8 기병 연대의 느린 진전에 불쾌해했다. 지난 18일, 그는 또한 밀번 장군도 그랬듯이 게이 장군에게도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두 사람 모두 연대가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 다음날 사단은 3대대대인 7기병대를 8기병연대에 붙였고, 사단장인 홈즈 대령은 파머 대령에게 낮 동안 타부동을 반드시 점령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KPA 13사단은 타부동에 도달하려는 8 기병대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KPA포와 모르타르, 자동무기 등은 도로 동쪽의 가산 월레드 시티 지역과 그 서쪽의 351 힐의 높은 지대에서 십자포화를 퍼부어 많은 사상자를 내며 연대를 후퇴시켰다. 9월 20일, 70 탱크 대대는 이 전투에서 7대의 탱크를 잃었다.[1]: 562

한편 1기병사단 오른쪽에서는 한국 1사단이 인상적인 성과를 거뒀다. 백선엽 장군의 오른편 연대인 12연대(미 10대 대공포병단)는 고산지대에서 KPA 진지의 틈새를 발견하고 그 사이로 곤두박질쳐 타부동 북동쪽 10마일(16km)의 다부동~군위 도로, 그리고 최첨단의 부대들을 넘어 약 13마일(21km)의 지점에 도달했다. 1 기병 사단 그곳에는 한국군이 KPA 1사단과 13사단의 본체 후방에 있었고 그들의 주요 퇴각선 중 하나를 차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침투로 인해 9월 19일 KPA 1사단은 새로운 위협에 맞서기 위해 가산(힐 902) 남쪽 경사지에서 제2연대와 제14연대를 철수시켰다. 이날도 월드시티 남쪽 가장자리까지 한국 기업이 침투했다.[1]: 562–3

유엔 공격 개시 당시 왜관-태구 도로를 따라 제5기병연대는 도로 북쪽 203번과 174번 힐즈, 반대쪽과 남쪽 188번 힐즈 등을 중심으로 KPA 진지를 공격했다. 약 1,000명의 KPA 8연대, 3사단의 병사들이 이러한 요직을 맡고 있었다. 제1대대대인 제5기병대는 9월 16일 공격을 개시했다. 다음날 제2대대대인 제7기병대가 합류하여 서쪽으로 더 멀리 253고지를 향해 이동했다. 그곳에서 북한 사람들은 7 기병대의 F와 G 회사를 중전투에 참가시켰다. 언덕에서 철수하는 것이 급박해지자 G사의 주장이 나왔다. 프레드 P. 데팔리나는 비록 부상을 입었지만 부하들의 철수를 커버하기 위해 뒤에 남아 있었다. 뒤이어 적군에게 매복 공격을 당한 데팔리나는 자신이 죽기 전에 그들 중 6명을 죽였다. 두 회사는 도로 이남으로 쫓겨났다. 3일 동안 203 힐의 한국 경찰청은 그것을 공격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절했다. 이 싸움에서, 70 탱크 대대의 A 회사는 9월 17일과 18일에 KPA 조치로 탱크 9대와 탱크 도저 1대를 잃었고, 그 중 6대는 기뢰로, 2대는 KPA 탱크 화재로, 2대는 KPA 대전차 화재로 잃었다. 지난 18일 한 탱크 액션에서 미국 탱크 화재는 3개의 더그인 KPA 탱크 중 2개를 쓰러뜨렸다. 마침내 9월 18일 203고지는 제1대대대인 제5기병대에 함락되었지만, KPA는 그 북서쪽 야산에서 저항을 계속하여 그들의 최강의 병력은 253고지에 있다. 이 전투에서 제2대대대의 3개 소총 회사인 제7기병대는 165명의 유능한 인력으로 축소되었고, F 회사는 45개의 효과군으로 축소되었다. 경찰청의 능숙한 박격포 사용으로 대부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9월 18일 종반에도 KPA 3사단은 왜관 동쪽 3마일(4.8km)의 언덕 질량을 253번과 371번 언덕을 중심으로 유지했다.[1]: 563

9월 18일, B-22는 왜관 서쪽과 북서쪽 낙통 건너편에 폭격을 가했지만, 명백히 한국공작원에 피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관 동쪽 야산에서의 전투는 1대대대 5기갑과 2대대 7기갑이 힐즈 300과 253에서 KPA와 매우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19일에 절정에 달했다. 제1대대대, 제5기병대의 원소들이 300 언덕의 정상에 올랐다. 그 언덕에서 1대대는 전투 사상자 207명, 미국인 28명, 부상자 147명, 실종자 4명이 발생하여 총 179명이 사망하고, 한국인 중 28명이 추가 사상자가 발생했다. 정오에, F 회사는 66명의 남자가 출근했다고 보고했다. E와 G 회사들 사이에 75명의 남자가 있었다. 그날 오후 이 대대는 전투 효과가 30%에 불과하다고 보고했다. 왜관 남동쪽 3마일(4.8km)의 대구도로를 장악하고 있는 300번과 253번 언덕 미사를 제5기병대가 압류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날 왜관을 사로잡는 데 5 RCT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언덕의 북쪽으로 1.6km 떨어진 곳, 완강한 버티기에 나선 371번 언덕의 KPA는 그 높이를 잡기 위한 제5 기병대의 모든 노력을 순간적으로 뒤로 돌렸다.[1]: 564

이후 왜관 지역에서 상주로 철수하면서 한국교원 3사단은 약 5,000명에서 약 1,800명으로 줄었다. 모든 부대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유엔 지상과 공중 행동이 합쳐져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제5기병연대가 옛 왜관주머니를 다시 점령한 왜관 주변에서는 북한 주민들이 재장착한 KPA 전차 28대와 T-34 27대, 미군 M4 셔먼 1대가 파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게이 장군은 19대 때 포위작전을 위해 병력을 기동하기 시작했는데, 이제 와관 동쪽의 힘겨운 전투가 마침내 가능해졌다. 중령 클라이노스는 자신의 1대대대인 7기병대를 사단 오른쪽에서 왼쪽 측면으로 이끌며 2대대대인 7기병대 앞에 자리를 잡고 타부동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게이는 3대대대인 7기병대에게 다음날 아침 오른쪽 옆구리에서 왼쪽으로 옮겨 타부동을 향해 돌진하는 1대대를 따라갈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9월 20일 아침, 3대대는 왜관 방향 도로에서 대구 북쪽의 트럭에 올라 북서쪽으로 굴러갔다. 연대장은 KPA 박격포와 포탄이 도로를 봉쇄할 것을 우려한 듯 병력을 목적지에 못 미치는 곳에서 내렸다. 그들의 발 행진은 부대를 피곤하게 했고, 그들이 집결지에 늦게 도착하게 만들었다. 이 과잉 주의는 게이 장군을 화나게 한 것은 같은 연대 2대대가 나흘 전 왼쪽 측면으로 이동했을 때도 같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오전 중에 제1대대대인 제7기병대가 300고지를 지나 왜관 쪽으로 길을 따라 내려갔다. 왜관으로부터 2마일(3.2km) 떨어진 09:00에 왜관에서 동쪽으로 3마일(4.8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가난한 2차도로의 주 고속도로를 차단하여 왜관-타부동 도로를 만났다. 이 후자의 도로는 북동쪽으로 굽이쳐 13km 떨어진 타부동까지 높은 산으로 양쪽에 걸쳐 있는 좁은 계곡 바닥을 따라 굽이쳐 있다. 70탱크 대대인 C사의 장갑차 선봉이 앞장섰음에도 주변 야산에서 발생한 도로 차단과 KPA 화재는 대대를 서서히 전진시켰다. 오후 중반까지는 겨우 3.2km(2마일)밖에 얻지 못했고, 왜관-타부동 도로로 통하는 컷오프 도로의 중간 지점에 불과했다. 탱크가 지뢰에 부딪히자 기둥이 완전히 멈췄다. 게이 장군은 연대장에게 1대대가 언덕에 KPA를 우회하게 하고 타부동을 위해 "하이테일링"하도록 지시하는 등 진척이 더딘 것에 대해 짜증을 냈다. 게이 장군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 1대대는 밀고 나가 타부동 도로에 이르러 13km 떨어진 마을 쪽으로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도로는 황폐화, 죽은 황소, 손상된 T-34 전차, 난파된 포탄, 버려진 탄약 더미, 그리고 다른 군사 장비와 보급품들이 그 진로를 어지럽히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대대가 밤새 멈추자 기뢰가 폭발해 클라이노스 대령이 다쳤다. 그는 대피를 거부했으나 다음날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대피했다. 그날 저녁 3대대가 바짝 뒤쫓아온 1대대는 타부동에서 4마일(6.4km) 떨어진 토개동 인근으로 진격했다.[1]: 565–6

이날 낮에 있었던 3대대의 조기 탈착은 게이 장군이 7기병 연대장을 교체하게 한 마지막 사건이었다. 그날 저녁 게이 장군은 연대를 지원해온 77 야전포대대의 지휘관인 해리스 연대장을 지휘했다. 해리스는 자정 직전에 지휘를 맡았다. 해리스 대령은 자정쯤 제7기병대가 아침에 타부동을 점령할 것이며, 마을에 먼저 도달한 원소는 남쪽으로 돌아서 8기병 연대와 연락하는 동시에 방어태세를 확립하여 도로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음 날인 9월 21일 아침, 1대대는 공격을 재개하여 12시 55분에 타부동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KPA의 저항에 부딪혔지만, 남서쪽과 북서쪽에서 서서히 움직이면서 16시 35분까지는 마을이 맑아졌다. 1시간 후 대대는 이날 오후 늦게 포위작전을 완료한 제8기병연대를 향해 남하하여 대구로를 따라 다부동을 빠져나왔다.[1]: 566

한편 제3대대대인 제7기병대는 다부동에 도착하여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도로 양쪽에 있는 방어 위치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이때쯤 국군 1사단의 원소들이 다부동 위 상주로를 절단하고 마을을 향해 남쪽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가장 멀리 진격한 한국 12연대는 군위 아래 북동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도로 봉쇄를 했다. 1기병사단과 한국 1사단의 작전이 대구 북부의 산악지대에서 KPA 3, 13, 1사단을 대량으로 차단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다음날인 9월 22일 한국 1사단 11연대와 한국 경찰 부대가 월리드 가산성을 점령했고, 한국 15연대의 원소는 북쪽에서 타부동에 도달하여 1기병사단과 연계를 맺었다.[1]: 566

우익

한국2군단의 산악지대에서 KPA 8사단은 기진맥진했고 15사단은 사실상 파괴됐다. 한국군 사단도 거의 탈진 상태였지만 한국군보다 전력이 더 컸고 다시 서서히 북상하기 시작했다. 한국 6사단은 2주 동안 무득점으로 버티던 KPA 8사단을 공격했고, 나흘간의 전투에서 사단을 전투병력으로 격파했다. KPA 소식통에 따르면 이 때 8사단은 약 4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생존자들은 무질서하게 예촌 쪽으로 북쪽으로 도망쳤다. 9월 21일까지 한국 6사단은 거의 반대하지 않고 의흥 이북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한국 8사단은 일단 집결해 북상하기 시작한 뒤 반대편인 KPA 15사단이 사실상 전멸한 상태였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을 찾지 못했다.[1]: 567

전투에 흠집이 난 키계(36°02′53″N 129°1)에서3′12″E / 36.048°N 129.220°E / 36.048; 129.220)-대한민국 I군단 부문 안강리경주 지역, 수도사단 부대들은 유엔 공세가 전개된 9월 16일 안강리 거리를 누비며 전투를 벌였다. 그 너머 한국 3사단포항동 바로 아래 형산강 북쪽 둑으로 올라갔었다. 다음날 서쪽에서 진격하는 제7보병사단 1개 대대가 수도사단의 요소들과 접촉을 맺고 2주간의 한국2군단과 1군단 간의 간격을 좁혀나갔다.[1]: 567

북쪽으로 은퇴한 KPA 12사단은 완강한 지연작전을 펼치며 9월 22일까지 수도사단에 기예를 내주지 않았다. 이어 안동 쪽으로 철수를 계속했다. 원래 중국 인민해방군의 한국군 참전용사들로 구성된 이 한 때 만만치 않았던 이 조직은 거의 파괴되었고, 그 힘은 약 2,000명에 달했다. 한국 사단은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고, 보급이 더 좋았으며, 매일 근접 공중 지원도 받았으며, 포항동 지역에서는 해군의 포격이 있었다. 지난 16일 해군 지원은 찰스 C 제독 당시 특히 효과적이었다. 포항동 앞바다에 전함 미주리호를 비롯한 하트만 태스크 그룹이 나타났다. 이 전함은 16인치 포탄에서 2000파운드의 포탄을 발사해 현산강 북쪽 둑을 따라 마을 아래 KPA 진지를 공격했다. 이틀 후 미주리주한국 3사단의 자문역인 엠메리치 대령에 의해 감시된 무선 사격 지휘 하에 다시 이러한 제5의 진지를 포격했다. 그 후 한국군은 다리를 건너 폭행을 가했지만, KPA 기관총 사수들이 그들을 진압했다.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리를 건너려다 144명이 부상을 입었다. 마지막 고육지책으로 31명의 국군 장병들이 자진해서 다리를 건넜다. 전투기들은 더미 스트래핑 패스를 KPA 둑에 맞대어 만들어 그들의 노력을 도왔다. 충전을 한 서른한 명 중 열아홉 명이 다리로 떨어졌다. 다른 한국 군인들은 강 북쪽에 발판을 마련한 소수의 사람들을 재빨리 보강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죽은 KPA 기관총수들이 그들의 둑에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1]: 567–8

동부에서의 유엔 공격의 사전 조치로, 9월 14~15일 밤 해군 함정은 러시아식 무기로 특별히 훈련되고 무장한 한국 밀양 게릴라 대대를 창사동(36°16′48″N 129°2)으로 수송했다.2′30″E / 36.28°N 129.375°E / 36.28; 129.375) 포항동 상공 10마일(16km)에서 대대가 KPA 5사단 후방에서 자정을 2시간 30분 남기고 상륙한 곳이다. 한국 3사단이 포항동 아래 전방으로 공격을 하는 동안 KPA 후방을 괴롭히는 것이 임무였다. 그날 저녁 KPA 5사단은 12연대에서 밀양 대대가 진지를 잡은 해안 야산으로 대대를 파견하여 교전시켰다. 한국 게릴라 대대의 노력은 완전히 실패로 변했다. 미 해군은 서둘러 원조에 나서 KPA 화재가 대대를 몰아붙인 해변에 해군 사격 고리를 둘러야 했다. 이것은 그것을 완전한 파괴로부터 구했다. 마침내, 9월 18일, 해군은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한국 해군 중 725명, 부상자 110명을 LST에 의해 대피시켰다. 39명의 사망자와 함께 대피하는 선박에 접근하려 하지 않은 32명의 사망자도 남아 있었다. KPA 후방을 괴롭히려는 이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한국 3사단의 도움은 거의 없었지만, 3사단의 요소들은 9월 19일 저녁 포항동 가장자리에서 전투순찰을 했다. 다음날 아침 10시 15분에 사단은 파괴된 마을을 점령했다. 한 연대는 그 마을을 지나 그 북쪽의 높은 지대로 나아갔다. 그리고 9월 21일과 22일 그 후 며칠 동안 한국 3사단은 해군의 포화와 전투기의 지원을 받아 흉해를 나포하고 KPA 5사단을 무질서하게 용독으로 몰아붙이는 등 강한 공격을 계속했다.[1]: 568

왼쪽 측면 — 대한축구협회가 소북산에서 철수함

At the other end of the UN line, the left flank in the Masan area, H-hour on 16 September found the 25th Division still fighting KPA forces behind its lines, and the KPA appeared stronger than ever on the heights of Battle Mountain, P'il-bong-san (35°05′56″N 129°17′35″E / 35.099°N 129.293°E / 35.099; 129.293) and Sobuk-san. 25th Division commander 윌리엄 B 장군 킨과 그의 참모들은 사단 전선의 산악 중심부가 KPA를 벗어나야 진주를 향해 도로를 따라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KPA가 산에서 그 뒤로 폐쇄되었던 8월 초의 태스크포스 킨의 경험은 아직도 그들의 머릿속에 생생했다. 따라서 그들은 25사단의 진격의 열쇠가 한국공병대가 키를 잡고 24보병연대를 매일 공격받는 그 중심에 놓여 있다고 믿었다. 진주와 마산 사이의 도로를 가로지르는 왼쪽 27보병연대와 오른쪽 35보병연대는 24보병대 앞의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시간표시를 거의 할 수 없었다.[1]: 569

그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9월 16일, 킨 장군은 로버트 L 소령의 지휘 하에 복합 대대 규모의 기동대를 조직했다. 울포크 제3대대대 35보병대 사령관은 다음날 그곳의 24보병 진지를 복구하는 임무를 띠고 KPA가 보유한 전투산과 필봉산 고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대책본부는 지난 17일과 18일 8·90 야전포대대의 포탄과 수많은 공습으로 이들 고지를 집중 공격했지만, 고지에서 발생한 KPA 자동사격이 매번 큰 인명피해를 내며 돌격부대를 몰아붙였다. 24시간 만에 27보병인 A사만 57명의 사상자를 냈다. 울포크의 세력은 지난 18일 KPA가 실패하자 정점에서 몰아내려는 노력을 포기했고 다음 날 태스크 그룹이 해체됐다.[1]: 569–70

9월 19일 아침, 한국공병대가 밤중에 전투산의 볏을 버린 것이 발각되었고, 제24보병대인 제1대대가 움직여 점령하였다. 오른쪽에는 35보병대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청암리(35°15′00″N 128°1) 앞 고지에 도달할 때까지 가벼운 저항만 있을 뿐이었다.6′30″E / 35.25°N 128.275°E / 35.255°E / 35.25; 128.275) 거미구멍 속에 교묘하게 숨어있던 KPA 병사들이 후방에서 1대대대 병사들을 향해 총을 쏜 곳. 다음날 1대대는 청암리를 사로잡았고, 2대대는 청암리에서 남강까지 북서진하는 긴 능선( captured線) 한편 KPA는 여전히 사단을 강하게 견제하며 27보병단이 전진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을 떠났다. 9월 21일 제35보병연대는 청암리에서 남서쪽으로 3마일(4.8km) 떨어진 노치를 점령한 뒤 무촌리 도로포크를 지나 진주 고갯길 높은 지대로 서쪽으로 13km를 무저항으로 휩쓸었다. 그곳에서는 22시 30분에 선두 대대가 하룻밤을 묵었다. 동시에 중앙과 사단 좌측에 있는 24연대와 27연대가 전진하여, 횡단해야 하는 험준한 지형 때문에만 속도가 느려졌다. 그들은 이전에 북한 사람들이 죽도록 싸웠던 자리를 따라 버려진 자리를 지나쳐 대한 석유 협회 자동 입지가 언덕을 벌집처럼 덮인 것을 보았다.[1]:570년

지난 3일간의 사건으로 중앙과 우측 25사단 앞 KPA가 9월 18~19일 밤 철수를 시작했음을 분명히 했다. 남강 이남에서 KPA 7사단이 철수했고, 6사단은 전방을 덮기 위해 요소를 편향했다. 6사단에 가려진 7사단은 19일 오전까지 남강 북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후 KPA 6사단은 소북산에 대한 입장을 철회했다. 공단 철수는 25사단 앞에서 일반적이었지만, 산속에는 여전히 지연 집단과 스트래글러들이 남아 있었다. 9월 22일 아침 툰덕 아래에서는 일부 북한 주민들이 24보병 A사의 바이부아크 지역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한 소대장이 깨어나 보니 적병이 자기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적의 총검을 움켜쥐고 다른 사람이 그 남자를 쏠 때까지 몸부림쳤다. 근처에서 또 다른 적은 잠든 세 명의 남자들에게 수류탄을 투하해 두 명이 죽고 세 명이 다쳤다. 조금 뒤 1대대 사령부에서 열린 중대 지휘관 회의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본부 중대장을 포함해 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 570–1

사단 진격을 앞둔 9월 22일 진주고개 KPA 6사단의 요소들이 하루 종일 35보병대를 봉쇄해 남강을 건너 서쪽으로 6마일(9.7km) 떨어진 진주를 관통했다. 제1대대대 35보병대의 돌격대는 고갯길에서 152고지 정상에서 200야드(180m) 이내에 진입했지만 더 이상 갈 수 없었다.[1]: 571

한국 경찰청은 철수한다.

9월 22일 항공 관측통들의 보고에 따르면 KPA의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없었다. KPA 북쪽에 큰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가 있는 반면, 남쪽으로 가는 큰 움직임도 목격되었다. 이날 8군 정보당국은 "적군이 모든 부문에서 후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전면적인 계획적인 휴·탈퇴 징후는 없다"고 상황을 추정했다. KPA 의도에 대한 이 추정은 잘못된 것이었다. 한국교원회가 철수하는 곳마다, 가능한 곳마다 강력한 봉쇄와 지연작전으로 철수를 엄호하고 있었다. 인천상륙 소식이 한국농협에 전해졌을 때 그것은 극도로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었고 아마도 그들의 급속한 악화의 가장 큰 단 하나의 요인이었을 것이라는 데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증거로 보아 인천상륙 소식은 거의 일주일 동안 KPA 장교들뿐만 아니라 부산 근교의 거의 모든 병력으로부터도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북한 최고사령부는 상륙 후 3, 4일이 지나도록 경계선 철수와 북방 어딘가의 재결합을 결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경계에서의 싸움과 KPA의 행동 양상은 이 사실을 반영한다.[1]: 571–2

8군단의 공세가 시작된 9월 16일 어느 곳에서도 38, 23d 보병연대가 KPA의 소멸된 병력을 뚫고 낙통강에 도달한 2사단 구역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물질적 이득을 얻지 못했다. 9월 19일까지는 가장 강력한 KPA 저항과 자발적인 철수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 곳이 도처에 존재했고, 일반적으로 유엔의 진전은 경미했으며, 심한 전투와 수많은 사상자의 희생만을 감수하고 구입했다. 그 후 9월 18~19일 밤 동안 KPA 7사단과 6사단은 북한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남쪽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6사단은 철수를 엄호할 조직적이고 효과적인 지연당사자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9월 19일 왜관이 미 5 RCT에 함락되었고, 대구 북쪽에 있는 한국 1사단은 KPA 1사단과 13사단의 배후지점까지 침투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 사단들은 철수를 시작했다. 다음날 동해안의 탈환했고 그 뒤 며칠 동안 그 앞에 있던 대한 석유 협회 5사단 병력은용독에서 급속도로 북상했다 3사단은 포항동을 한국. 동시에 한국은 전방 동쪽 절반의 산악 지대에서 전면적인 진격을 가했다. 1 기병사단은 9월 20일과 21일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21일 마침내 타부동을 탈환했다. 미 2사단 서부는 9월 21일과 22일 완강한 KPA 지연군과 싸웠다.[1]: 572

여파

9월 19일부터 시작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주변의 전투가 부산지역에서의 KPA 조치에 미친 영향은 분명했다. 그 날까지 북한 최고사령부는 남쪽에서 자행한 주력 부대를 철수시키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9월 23일까지 이 북한의 역행운동은 주변 도처에서 본격화되었고 그들의 저지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어 8군단과 한국군은 후퇴하는 한국공군을 추격하기 위해 반격에 나섰다.[1]: 572

참고 항목

참조

  1.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ppleman, Roy (1961).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June - November 1950 (PDF).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ISBN 0160359589.Public Domain 글은 공개 도메인에 있는 이 출처의 텍스트를 통합한다..
  2. ^ Korea 1950 (PDF).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Public Domain 글은 공개 도메인에 있는 이 출처의 텍스트를 통합한다..

좌표: 35°06′N 129°02′E / 35.10°N 129.04°E / 35.104; 12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