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백작 산초
Sancho, Count of Provence산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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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 백작 | |
군림하다 | 1181–1185 |
전임자 | 라몽 베렌게르 3세 |
후계자 | 알폰소 2세 |
세르다냐 백작 | |
군림하다 | 1175–1188 |
전임자 | 피터야. |
후계자 | 누뇨 산체스 |
루실론 백작 | |
군림하다 | 1208–1212 |
후계자 | 누뇨 산체스 |
죽은 | 1223 |
배우자 | 에르메센다 산카누녜스데라 |
이슈 | 누뇨 백작 |
집 | 바르셀로나 |
아버지 | 라몬 베렌게르 4세, 바르셀로나 백작 |
어머니 | 아라곤의 페트로닐라 |
산스 또는 산체라는 철자도 쓴 산초( 12ied, 1223년 사망)[a]는 카탈라노 아라곤의 귀족이자 정치가였으며 아라곤의 페트로닐라 여왕과 바르셀로나의 레이몬드 베렝가르 4세 백작의 막내아들이다. 그는 세르다냐(c.1175–1188), 프로방스(1181–1185), 게바구단(1181–1185), 로데즈와 칼라트(1183–1185), 루실론(1208–12)의 다른 시기에 있었다.[b] 그는 1209년부터 1218년까지 레이몬드 베렝가르 4세 백작 때 프로방스 섭정, 1214년부터 1218년까지 아라곤 섭정, 제임스 1세 소작 때 아람 섭정 등을 지냈다.
인생
세르다냐 백작
산초는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1162년) 미성년자였고, 토지나 직함을 물려받지 않고 형들이 상속자 없이 죽어야만 역전의 권리만 있다.[1] 따라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프로방스 백작인 형 레이몬드 베렝가르 3세가 1181년 암살된 뒤에야 프로방스와 세르다냐를 물려받았어야 했다. 실제로 당시 프로방스를 물려받았지만, 그 직전에 세르다냐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2]
산초는 큰형 알폰소 2세와 아라곤의 왕 알폰소 2세의 왕실 헌납을 처음 목격하기 시작한 1175년 사이에 성년이 되었다. 이 몇 년 동안, 그는 카탈로니아와 프로방스에서만 헌납을 목격했다. 1180년 이전에는 가끔 '세르단야 백작'(세리타니를 이긴다)이라는 제목으로 문서에 서명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그저 '왕의 형제'로 묘사되었다. 알폰소는 1177년과 1188년에 다시 군에 개입했기 때문에 세르다냐의 그의 행정부를 전적으로 신뢰한 것 같지는 않다. 산초는 그 후 세르다냐의 카운트로 기록되지 않는다.[1][2]
프로방스 백작
산초는 1181년 프로방스 군을 계승한 후 첫 번째 책임은 툴루즈의 레이몬드 5세 백작의 주장으로부터 군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후 4년 동안 산초와 그의 동생 알폰소는 툴루즈와의 전쟁을 기소했다.[3] 1182년 12월 9일 알폰소는 Aix에 있는 동생을 방문하여 기사 호스피스탈러에게 프로방스에서의 상업적 의무와 통행료를 면제해 주었다.[4] 1183년 3월, 알폰소는 게바단, 로데즈, 칼라트의 군과 함께 산초를 퇴각시켰다.[5][6][7] 산초는 1184년 11월 동생을 만난 페르피난에 머문 경비로 살아남아 그의 궁정 기능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8]
프로방스 정권 초기에 그와 이웃한 왕자인 포칼퀴어의 윌리엄 4세 백작 사이에 매년 봄 갈등이 일어났다.[9] 마침내 1184년 산초는 포칼키에 백작, 툴루즈 백작, 제노바 공화국과 동맹조약을 맺어 아라곤의 제노바를 지배하려는 노력에 반대하며 마르세유 성을 빼앗기로 합의했다. 그 후 산초는 피사에 대항한 그 공동체의 전쟁에 제노바 편에 개입했다.[1][10][11][7] 이러한 불성실의 행동은 형제간에 불화를 일으켰고, 알폰소는 프로방스 산초, 게바구단, 로데즈, 칼라트를 몰수했다. 그 대신 그는 프로방스에서 그의 보석관이나 대리인으로 포익스 백작 로저-베르나르드 1세를 임명했다.[12]
일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왕은 프로방스를 장악하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13] 알폰소는 1185년 3월 AIX에 있었고, 그 때 헌장의 데이트 조항에는 "우리의 형제인 산초의 손에서 프로방스를 되찾았을 때"라고 적혀 있었다. 알폰소의 악의를 보여주는 증거는 알폰소가 "그의 형 산초"를 결코 사랑하지 않았고 그의 왕국에서 아무것도 주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게스타 코미툼 바르시노넨시움에서 찾을 수 있다.[c][14] 산초와 알폰소의 적개심은 토르나다에서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골치 아픈 사람 페이레 비달의 통고를 받았다.[15]
- 프랑 레이스, 프로엔사, 아펠라,
- 콰엔 산초 라·우스 데스클라벨라
- e gasta/us la cer'e/l mel.
- 이사이 트램펫 vos lo fel.
- (노블 왕, 프로방스가 너를 부르짖고 있다, 그것은 산초 경에게 멸시당하고 있다, 그는 밀랍과 꿀을 가져다가, 네게 쓸개만 보내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버트란 드 본은 프로방스에서 산쵸를 인기있는 것으로 제시한다.[14]
- 프로엔자 씨, 돈 에스 에이시츠 씨
- 산소 프레잔 마이스...
- (그 [알폰소]는 그가 떠난 프로방스를 잃고 있고, 그의 형 산초는 더 사랑받는 곳에서...)
제명 후에도 산초는 프로방스 백작의 스타일을 계속했다.[3]
루실론 백작과 프로방스 프로큐레이터
1204년 산초와 그의 아들 누뇨 산체스는 산초의 조카인 베드로 2세의 새 부인인 몽펠리에의 마리아에게 루실론 군을 기증하는 것을 목격했다. 루실론은 산초에게 야망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기부한 것을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16] 1208년, 베드로가 마침내 산초에게 루실론 군을 허가했다. 1209–10년에 산초는 "비카르와 보석상"(비카리우스 외 바이울루스), 페르란 드 노르바이스의 손에 일상적인 정부를 떠났다. 1211년 1월, 베드로가 구이렘 드 크리셀에게 군 수입금을 내주었는데, 구이름이 왕의 채권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초는 1212년까지 계속 군을 다스렸다.[2]
1209년 프로방스에서 산초의 조카이자 알폰소 왕의 후계자인 알폰소 2세가 죽었다. 그는 미성년자인 레이먼드 베렝가 4세를 후계자로 남겼다. 베드로 왕은 레이몬드 베렝가르를 대신하여 프로방스의 산초 총독을 임명하였다. 그의 첫 번째 임무 중 하나는 반항적인 도시 아를 제압하는 것이었다.[17] 산초는 또 즉시 친아들 누뇨를 프로방스 정부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프랑스와 교황의 영향력을 침해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공동체의 자유와 상업적 활동을 선호하는 정책을 함께 추구했다.[3] 베드로는 프로방스의 지지 근거지로서 산초와 누뇨에게 아가지, 보치, 모나코의 항구를 허가했다.[18]
1212년 산초는 베드로 2세의 편에 있는 라스 나바스 드 톨로사 전투에서 싸웠다.[3] 같은 해 루실론은 산초에서 아들 누뇨로 옮겨졌고, 후자는 세르다냐, 콘클렌트와 함께 평생 붙잡혔다.[2]
피터 2세는 1213년 무레트 전투에서 반카타르 십자군과 싸우다 죽었다. 그의 후계자 겸 후계자 제임스 1세는 미성년자였던 레스터 백작 시몬 4세 데 몽포르에 포로로 잡혔다. 나르본느에 포로가 된 왕을 되찾고 죽은 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곧 비스카운트 아이메리 3세의 지원으로 군대가 집결되었다. 산초와 그의 아들 누뇨가 이 자리에 참석한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제임스의 석방을 확보한 베네벤토의 교황교구 베드로에 의해 상황은 확산되었다.[19]
왕국의 프로큐레이터
반대 및 좌절(114–1216)
베드로가 자신의 왕국을 교황의 권위에 앉혔기 때문에 교황 공관은 아라곤의 템플 기사단의 거장인 길렘 드 몽트로돈의 후견하에 제임스를 배치하고 산초는 사실상 섭정관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3] 산초의 정확한 임명 날짜는 확실하지 않다: 그것은 1214년 말이나 1215년 초에 일어났다.[3][20] 제임스는 자서전적 Llibree dels fets에서 나중에 산초는 왕이 되고 싶어하고 왕위를 빼앗을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10] 비록 이 주장이 역사학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역사학자 살바도르 산페레는 산초의 행동을 "진정"하기 위한 노력으로 짧은 일화를 썼다.[21]
1214년 여름, 베네벤토의 베드로가 레이다에 왕국의 평의회를 소집하였다. 모인 성직자와 귀족들은 제임스의 소수자를 위한 정치 프로그램에 동의했는데, 여기에는 새로운 세금에 대한 금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산초는 그 프로그램을 시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10] 그러나 그의 권력 기반은 프로방스에 있었고 아라곤과 카탈로니아에서 제한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특히 사이먼 드 몽포르와의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선호 정책 때문이었다.[19]
1214년 베아른의 점수와 비고레 백작 가스톤 6세가 죽었다. 산초는 비고레 군이 아라곤의 궤도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1215년 아들 누뇨가 개스톤의 미망인인 세습 페트로닐라와 결혼하도록 주선했다. 1216년 성직자들이 결혼을 무효화했을 때 그 계획은 실패했다. 페트로닐라는 결국 사이먼의 동생 가이 드 몽포르와 결혼하게 되었다.[19]
1215년 11월 산초는 로마에서 제4차 라테란 평의회에 아라곤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페드로 아호네스와 기욤 4세 데 세르베라라는 두 명의 사절을 보냈다. 평의회에서 그들은 세고르베의 히스패닉 주교와 함께 산초의 반 크러세이드를 훼손했다. 결국 의회는 십자군 원정의 합법성을 지지했다. 산초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또한 권위를 강화시켜 달라고 요청했으나, 대신 1216년 1월 23일의 일련의 명령을 받고, 인노첸이 산초를 보좌하기 위해 아라곤과 카탈로니아 양쪽에서 온 귀족 7명을 대리 상담자로 임명하고, 왕국의 모든 남성들에게 트렉을 관찰하도록 명령한 것으로, 사절들은 돌아왔다.십자군과 교전하다 인과응보는 아라곤과 카탈로니아에 그의 전쟁에 자금을 대기 위해 베드로 2세에 의해 전당 잡힌 왕족의 데메스네를 섭정하는 섭정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라고 명령했지만 왕실의 재정은 길름 드 몽트로돈에게 이양되었다. 그 결과 산초는 자신의 권력이 강화되기는커녕 축소되는 것을 알았다.[10][19]
오시타니아의 전쟁 (1216–1218)
산초는 라테란에서의 좌절 때문에 십자군에 대한 정책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레이몬드 베렝가르 4세가 성년이 되고 산초의 프로방스 2차 정권이 끝나면서 동시에 프로방스에서 흔들린 권위를 회복하려는 툴루즈와 아라곤의 집들의 일치된 노력이 있었다.[22] 라테란 평의회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툴루즈의 레이몬드 6세 백작은 산초로부터 피난을 허락받았다. 1216년 4월, 프랑스의 필립 2세는 공식적으로 레이몬드의 부조금을 시몬 드 몽포르에게 주었다. 레이몬드는 프로방스에서 자신을 위해 싸우기 위해 1216년 봄 아라곤과 카탈로니아에서 기사들을 모집하려고 시도했다. 독일의 프레데릭 2세 황제의 편지에 고무된 레이먼드는 6월 보케어를 포위했다.[d][19]
1216년 6월 12일 산초는 아라곤의 발라게르에서 도시의 사실상의 정부였던 경건한 평신도회 마르세유 성령 교화회의 대표들과 조약을 맺었다. 서명자들은 제3자에 의한 어떠한 공격의 경우에도 서로 돕기로 합의했다.[19] 1216년 9월, 산초의 지지와 아마도 카탈루냐와 아라곤 기사들을 따라 툴루즈의 레이몬드가 툴루즈 군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를 침공했다. 시몬 드 몽포르트는 1218년 툴루즈 포위전에서 살해되었다.[20]
1216년 10월 26일 바르셀로나에서 산초와 누뇨는 베아른, 아들 기욤, 세베라의 점주인 기욤 라몬 드 몬타다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비고르의 페트로닐라가 가이 드 몽포르와 결혼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는데 베아른의 점수는 위협적인 움직임을 고려했다. 새로 발견된 동맹국들은 비고르를 침공했고 그 결과 시몬 드 몽포르트는 루르데스에 대한 그의 포위망을 풀었고, 십자군이 아라곤주의 서쪽 측면에 가한 위협을 일시적으로 제거했다.[19]
산초의 오시타니아 개입 정책은 몬테아라곤의 주모자인 조카 페르디난드가 이끄는 아라곤 귀족의 파벌과 교황청과 화해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반대했다.[21] 페르디난드는 후스카, 자카, 자라고사 등에서 지역 반란을 부추기기도 했다.[19] 1217년 12월 28일과 29일의 황소 2마리에서 교황 호노리오 3세는 각각 제임스와 산쵸를 파문하고, 그들이 레이몬드 6세의 명분을 버리지 않으면 그들의 영토에 대한 십자군을 승인하겠다고 위협했다.[20] 산초는 여러 쪽의 압력에 시달려 툴루사인 동맹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것 같아 섭정 자리에서 물러났다.[3][10]
1218년 9월 8일, 산초는 제임스와 협정을 맺어 정식으로 섭정을 종결시켰다. 그는 왕과 평화를 유지하기로 동의했고, 그 대가로 왕은 그에게 땅과 수입을 주었다. 아라곤의 다섯 성에서 온 1만 5천 솔디와 바르셀로나와 빌라프란카에서 온 1만 솔디. 제임스는 또한 7년의 기간 동안 자신의 땅을 공격하거나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 마지막 조항은 산초가 십자군과 계속 싸울 경우 제임스의 중립성을 확보했다. 역사학자 페란 솔데빌라는 평화를 지키겠다는 산초의 약속을 그의 사임이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은 아니라는 표시로 여긴다.[20][23]
사임 직후인 1218년 9월 같은 달, 산초는 르리다의 회합에 참석하였는데, 제임스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몽펠리에의 특권을 확인하자 왕의 보좌관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이 같은 집회는 산초 대신 구이름 4세 데 세르베라를 주창자로 임명하였다.[24]
결혼과 자녀
1184년 전 어느 날 산초는 로카베르티의 제프리 1세와 빌라드물스의 딸 에르메센다와 결혼했다. 1185년 누뇨 페레스 데 라라 백작과 테레사 페르난데스 데 트라바의 딸인 산차 누녜스 데 라라와 결혼하여 레온의 페르난데스 2세의 의붓딸로 태어났다. 그녀에 의해 그는 그의 유일한 아들인 누뇨 산체스를 얻었다.[3]
메모들
- ^ "산초"는 스페인어, "산스크"는 카탈로니아어, 그리고 "산체"는 프랑스어다.
- ^ 프로방스는 신성로마제국 아를레스 왕국의 일부였던 반면, 루실론과 세르다냐는 명목상 프랑스 왕국의 일부였다; 게바구단, 로데즈, 칼라트는 논쟁의 여지없이 프랑스의 일부였다. 프로방스 카운티는 프로방스의 일부만을 포함했는데, 프로방스 후작(툴루즈 카운트에 의해 지배됨)과 포르칼퀴어 카운티도 포함되었다. 루실론과 세르다냐는 사실상 바르셀로나 백작에 속했는데, 이들은 카탈로니아의 신흥 공국을 통치하는 사실상의 독립된 왕자들이었다. 프랑스는 코르베일 조약(1258년)에서 이들 카운티에 대한 권리를 공식적으로 양도했을 뿐이다.
- ^ Fratrem quoque sum iam detci Ildefonsi regis Aragonensis, Sancium nomine, nunquam derecemsui regni allei 감히 volituit.
- ^ 독일의 왕으로 선출된 프레데릭은 또한 아를레스 왕국의 통치자였다; 그는 1220년까지 황제로 즉위하지 않을 것이다.
참조
각주
- ^ a b c 샤이에트 2001, 페이지 333.
- ^ a b c d 비송 1984, 1권 194.
- ^ a b c d e f g h 살라크 2016.
- ^ 미레트 i 산스, 조아킴 1904, 페이지 417.
- ^ 아우렐 1986, 페이지 183.
- ^ 미레트 i 산스, 조아킴 1904, 페이지 419.
- ^ a b 스미스 2010, 페이지 29n 78.
- ^ 비송 1984, 제2, 페이지 120–23.
- ^ 프레이저 2006, 페이지 3
- ^ a b c d e 비송 2000, 페이지 58-60.
- ^ 오르비타니 부쉬 2001, 페이지 241.
- ^ 오르비타니 부쉬 2001, 페이지 9.
- ^ 오르비타니 부쉬 2001, 페이지 71n 33, 조안 카베스타니를 인용했다.
- ^ a b 리커 1950, 페이지 211–13.
- ^ 프레이저 2006, 페이지 197.
- ^ 오르비타니 부쉬 2001, 페이지 68-69.
- ^ 스미스 2010, 페이지 41.
- ^ 오르비타니 부쉬 2001, 페이지 74.
- ^ a b c d e f g h 스미스 2010, 42-47페이지.
- ^ a b c d 오르비타니 부쉬 2001, 페이지 16-17.
- ^ a b 오르비타니 부쉬 2001, 페이지 71n. 33.
- ^ Léglu, Rist & Taylor 2014, 페이지 13.
- ^ 비송 1989, 페이지 355.
- ^ 비송 1989, 페이지 360–62.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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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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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tin-Chabot, Fernand-Eugène (1902). La politique hors d'Espagne d'Alphonse II, roi d'Aragon (1162–1196) et marquis de Provence (PhD). Mâcon: École des Char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