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네마냐

Stefan Nemanja
스테판 네마냐
Stefan Nemanja.jpg
스테판 네마냐의 기부자 초상화, 스터데니카 수도원 성모교회의 프레스코
세르비아의 대공
군림하다1166–1196
대관식1166
전임자스테판 티호미르
후계자스테판 2세 네만지치
태어난c. 1113/1114
리브니차
죽은(1199-02-13)13 1199년 2월
힐란다르의 수도원
매장
배우자아나스타샤
이슈
사후명
미러몽 시메온
왕조네만지치
아버지자비다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재적응)
서명Seal of Stefan Nemanja

스테판 네마냐(세르비안 키릴어: сеааннн,,,,, [ [, [Stefaːn němaɲa]; 1113년 또는 1114년 – 1199년 2월 13일)는 세르비아 대공국(라슈카라고도 한다)의 대왕자(벨리키 시우판)이다. 라스시아)는 1166년부터 1196년까지이다. 부카노비치 왕조의 일원이었던 네마냐네마니치 왕조를 세웠으며 세르비아 문화역사에 공헌하여 세르비아 제국은 물론 민족 교회로 진화할 것을 세운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세르비아 과학 예술 아카데미에 따르면, 네마냐 역시 문학적 공헌과 이타적 속성 때문에 가장 주목할 만한 세르비아인 중 한 명이다. [1][2][3][4][5][6]

1196년, 세르비아를 서구 및 비잔틴 세력권과 구별하면서 세르비아를 통합한 제3차 노르만족의 발칸 침공(1185~1186)을 포함한 30년간의 전쟁과 협상 끝에 네마냐가 중남 스테판 네만지치를 위해 퇴위했고, 후에 세르비아의 초대 왕이 되었다. 네만자는 결국 아토스 산으로 가서 승려가 되어 시메온의 이름을 따서, 이미 세르비아 정교회초대 대주교가 된 막내아들(성 사바로 알려져 있다)과 합류했다.[7][8][9]

네마냐는 아들 생 사바와 함께 1198년부터 1199년까지 아토스 산에 있는 힐란다르 수도원을 복원하고, '힐란다르의 찬가'를 발행했다. 그리하여 수도원은 아토스에서 세르비아 정교회의 수도원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르비아 정교회는 생 시메온 더 미르흐스트리밍(Saint Simeon the Mirrh-streaming)이라는 이름으로 스테판 네마냐를 시성하였다([10]세르비아 정교회는 сееооннннн ( ( ( ( (ррррррррррр ( ( ( ( ( ( ( ( ( ( ( ( ( ( ( ( ().

초년기

네만자는 서기 1113년 또는 1114년경에 제타(몬테네그로의 수도인 현재의 포드고리차 부근)의 리브니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음엘제 왕자인 사비다의 막내아들로, 형제들과의 갈등 끝에 리브니카로 보내져 주님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자비다(벨리 우로시)는 아마도 우로시 1세부칸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서부 제타가 로마 가톨릭의 관할하에 있었기 때문에 네만자는 비록 그의 말년의 삶의 많은 부분이 서양과 동양 형태의 기독교를 균형 있게 하는 데 쓰였지만 [11]라틴어 세례를 받았다.

비잔틴 군대가 두클자의 네마냐의 친족 조르제베와 데사 우로셰비치를 무찌른 후, 보지슬라블레비치 가문의 그 지파가 쇠퇴하자, 자비다는 그의 가족을 라슈카에 있는 그들의 세습지로 데려갔다. 라슈카의 수도 라스(Ras)에 도착한 네마냐는 동방 정교회에 재입교했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은 성공회였다.

비잔틴-헝가리 전쟁

코사니카와 토플리카 강이 합류하는 곳에 있는 하나님의 성모 교회의 잔해. 이것은 네마냐가 1158–1162년에 지은 첫 기부금이다. 수도원은 1688–1690년의 대 비엔나 전쟁이나 터키 전쟁 중에 세르비아인들의 대이동이 있은 후 버려졌다.

1163년 마누엘 1세 콤네누스 황제는 세르디카(소피아)를 거쳐 군대를 이끌고 니슈로 왔고, 그곳에서 존 키나모스에 따르면 "세르비아에 관한 일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당시 세르비아는 헝가리의 왕조 분쟁에서 스테판 3세의 동맹인 대주판(아르크주판 또는 메가주파누스) 데사의 지배를 받았으며, 따라서 마누엘의 적수였다. 데사가 마침내 황제 이전에 니슈에 강제로 끌려와 헝가리의 왕 스테판 3세와의 인맥이 드러나자 데사는 그를 자신의 주인 마누엘 1세라고 불렀고, 그를 법정에 세워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데사는 먼저 구금되어 경호를 받은 뒤 콘스탄티노플의 법원 교도소로 보내졌다.

라슈카에서는 헝가리인들과 동맹을 맺은 대주판 데사를 교체하고 대신 친그리스 당에 있던 자비다의 아들들의 행정부에 땅을 주었다. 사비다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티호미르, 스트라시미르, 미로슬라브, 그리고 막내 네마냐. 티호미르는 가장 나이가 많았고 라슈카의 그랜드 주판이 되었다. 그는 라슈카의 특정 지역을 통치하는 형제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스트라시미르는 웨스트 모라바, 미로슬라프 자흐멜제, 스테판 네마냐가 이바르, 토플리카[sr], 두보시카(레스코바크 주변) 일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스테판 네만자는 아나스타샤와 결혼하였는데, 그와 함께 세 아들 부칸스테판라스트코와 딸 부크와 데바와 에피미자를 두었다.

비잔틴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는 헝가리의 불만과 내부 갈등을 보고 받았기 때문에 헝가리에 대항해 대규모 군대를 일으켰다. 헝가리 왕자인 벨라 3세는 결혼을 한 콘스탄티노플에서 살아야 했고, 벨라의 땅인 남부 헝가리(벨레빗 이하)의 달마티아도 콘스탄티노플의 지배하에 있어야 했다. 헝가리에 저항이 있어 마뉴엘 황제가 유세에 나서는 이유다. 비잔틴군은 1165년 제문스렘을 정복했다. 그리스인들은 세르비아인들의 의무적인 분리를 동반했다. 존 두카스 콤네노스가 지휘하는 두 번째 비잔틴군은 서쪽으로 이동했고, 라슈카와 보스니아를 가로질러 아드리아 해안을 향해 이동했다. 그들은 큰 저항 없이 스플릿에서 바르까지 모든 도시를 점령하여 비잔틴의 지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성 수도원 현대판 쿠르슈믈리자 근처에 있는 반즈스카 강과 토플리카 강이 합류한 니콜라스의 말이다. 이 교회는 1166년 경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네마냐의 두 번째 기부를 상징한다. 콘스탄티노플의 최고 거장들이 짓고 그렸다.

비잔틴인들은 또한 아드리아 해안의 중요한 항구인 안코나 해안을 점령한 이탈리아에서의 캠페인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앞서 이탈리아 북부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정복 당시 도움을 청하기 위해 비잔티움으로 눈을 돌렸던 베니스아드리아해를 잃을 것을 우려해 그리스인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그것은 그리스에 대항하는 자연적인 동맹국으로서 헝가리에 접근했다. 동시에 그들은 비잔티움에게 반항하기 위해 세르비아인들 사이에서, 특히 라슈카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166년 헝가리인들은 비잔티움을 새로 정복한 지역에서 밀어내기 위해 반격했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여 마누엘 황제는 헝가리와 다뉴브강에서 온 3개 군단과 카르파시아를 가로질러 파노니아 중심부를 향해 다른 2개 군단을 진격시켰다. 헝가리 본군이 다뉴브,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등을 향해 작전을 펼치는 동안 두 비잔틴군은 자신들의 영토 깊숙이 들어가 총공황을 일으켰다. 헝가리인들은 1167년 그들의 손해에 대한 매개자를 통해 평화를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성 동굴 수도원 교회의 잔해. 라스 요새 기슭의 절벽 위에 있는 대천사 마이클.[12] 민간 전설에 따르면, 네마냐가 이 동굴에 갇혔다고 한다.

세르비아인 중 베네치아와 헝가리의 이상적인 후보로서 네마냐가 나타났는데, 이때 그의 형제들과 무엇보다도 위대한 주판 티호미르는 그를 포트리스 라스 근처의 동굴에 감금했다. 네만자는 아마도 친그리스당의 전 대표로서 데사를 대신하기를 바랐을 것이고, 마뉴엘 황제는 큰형 티호미르를 왕위에 앉혔다. 그 때문에 화가 난 네마냐는 헝가리와 그 동맹국들을 위해 정책을 바꾼다. 네마냐가 지하감옥에서 탈출해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네마냐의 아들이자 전기 작가인 스테판 네만지치는 아버지의 젊음을 묘사하면서 어떻게 '천한 힘'의 도움으로 탈출했는지를 말한다: "또 다시 이것은 온순함과 정의, 훌륭한 겸손함, 그리고 모든 좋은 관습 때문에 그는 바위굴에서 그를 꺼내어 조국의 왕좌에 앉혔고, r그를 천하의 대왕으로 추대했다.

왕위에 오르다(1168-1172)

아마 1166년 또는 1167년 네마냐가 라스(라스 요새)에 지지자들을 모아 그리스인들의 지지를 찾고 있던 티호미르에 대항하여 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네마냐가 티호미르를 전복시켰지만 비잔티움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형제간의 결정적인 전투는 1168년 코소보 판티나 근처에서 벌어졌는데, 티호미르의 군대가 패배하여 그는 시트니카 강에서 후퇴하던 중 갑옷으로 익사했다.

성당 현대판 노비 파자르 근처의 언덕에 있는 조지. 이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171년경에 세워진 네마냐의 세 번째 기부를 대표한다. 그것은 코토르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최고의 해안 석공들에 의해 지어졌고, 프레스코화는 그리스의 최고 거장들에 의해 그려졌다.

이듬해 네마냐가 비잔틴의 신하인 제타 라도슬라브 왕자를 공격했고, 그 사건으로 당시 제타와 네레트바 지역의 일부분이 그의 나라에 병합되었다. 곧 마누엘 1세 콤네노스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충돌하게 되었고, 그의 명령으로 1171년 3월 12일 비잔티움의 모든 베네치아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에 베네치아에서 비잔틴 소유로 가는 약 120척의 배를 이끌고 베네치아 해군을 진수하였다. 베네치아 함대는 그 해 9월 비잔틴 트로기르두브로브니크를 정복하여 동쪽으로 향했다. 그 후 네마냐는 베네치아인들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고 비잔틴 코토르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으며, 동시에 주요 공공도로가 비잔틴 베오그라드니시 사이를 지나는 모라비아 계곡을 통해 습격을 감행했다. 1172년 라브노 요새 근처에 있는 그 도로의 뤼벡의 아놀드에 따르면 세르비아인들은 비잔틴인들을 동반한 사자 앙리가 이끄는 서양 기사들과 순례자들의 진영을 야간 공격했다.

헝가리 왕국도 비잔티움과의 싸움에 가담했고, 프레데릭 바르바로사 신성로마제국(1152~1190)도 이 동맹을 지지했다. 네만자는 헝가리의 도움을 기대했으나, 그 사이 1172년 3월 4일 헝가리 국왕 스테판 3세가 사망하였다. 헝가리 특사단은 마누엘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진을 친 세르디카(소피아)로 가서 캠페인을 준비했다. 헝가리 왕위는 마누엘의 후보 벨라 3세(1173-1196)가 차지했다. 그러던 중 1171년/72년 겨울 치오스 섬에서 베네치아 군대가 전염병으로 격멸되어 세르비아인들은 비잔티움과의 싸움에서 홀로 남게 되었다. 마누엘은 즉시 호기를 틈타 헝가리 특사단을 접견한 뒤 군단장의 세르비아로 향했다. 다가오는 비잔틴 군대 전에 대주판 네마냐가 산으로 후퇴했다.

비잔틴 역사학자 존 키나모스에 따르면 베네치아인들은 네마냐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

비잔틴의 신하 (1172년-1182년)

그리스어로 스테판 네마냐(Belgrade의 국립박물관)의 납 바다표범 또는 불라.

이 갈등은 네마냐가 마누엘 황제에 항복하면서 끝이 났다. 어느 날, 네마냐가 니슈에서 이성적으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에게 복종했다. 맨발로 옷을 팔꿈치까지 찢고 목에 밧줄을 감고 손에 칼을 들고 비잔틴 진영으로 들어가 황제로 나갔다. 마누엘 앞에 도착한 그는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칼을 건네주며 원하는 대로 했다. 비잔틴 황제는 자신의 겸손함을 받아들였고, 신하 의무의 갱신에 동의하고 네마냐를 대주파의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 부분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벌어졌는데, 그곳에서 네마냐는 마노엘의 승리행렬에 노예로 끌려갔고, 모인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다.

비잔틴 황제 마누엘 콤네누스는 네마냐를 그랜드 조판 지위에 복귀시켰고, 서모라비아 주변의 스트라시미르와 미로슬라프 자클루미아 등 그들의 지역을 형제들에게 확인했다. 라슈카로 돌아오자 네마냐 대통령은 중앙정부를 통합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티호미르의 아들과 후계자 프르보슬라브에게 자신에게 유리한 통치자의 주장을 포기하라고 강요했다.

그의 신하의 임무에 따라 네마냐는 정기적으로 비잔틴 군사작전에 보조 분리를 보냈다. 세르비아 분리군도 1176년 9월 17일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럼주 술탄국의 군대를 소아시아 소련의 협곡에서 격파한 비잔틴군의 일부였다.

1290년 성당에서의 프레스코. 1176년에 열린 이단과의 협의회를 그린 아릴레제의 아킬레스. 오른쪽 아래 구석에 가짜가 보인다.

보구밀주의는 비잔틴 제국에서 11세기 전반과 12세기 전반기에 절정에 달했다. 12세기 말 세르비아인과 다른 발칸 슬라브인들 사이에 매우 널리 퍼져 있는 슬라브식 그루스티즘이나 보구밀주의라는 이원론적 가르침이 있었다. 보고밀주의의 주된 정치적 경향은 비잔틴 국가 및 교회 당국에 대한 저항이었다.

보구밀주의 자체는 라슈카나 보스니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매우 널리 퍼져 있었고, 귀족들 사이에 퍼져 있던 것이 이에 대한 네마냐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들에 대한 추가 조치에 대한 결정이 내려질 주-교회를 소집했다. 그 회의에는 비잔틴 교회 고위 인사들이 참석했다. 그것에 대해 귀족들 중 일부는 자신들에 대한 어떠한 행동도 반대했지만, 결국 그들을 국외로 추방하고 처벌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보구밀 족은 평의회의 결정에 무기로 반대하여 네마냐가 보구밀주의가 멸망한 그들과 진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국외로 추방되었고, 재산은 불에 타 압류되었고, 일부는 신앙을 숨긴 채 국내에 남아 있었다.

비잔티움과의 전쟁(1183-1191)

1180년 9월 24일 마노엘 천황의 서거 후 헝가리 왕 벨라 3세는 비잔티움에게 더 이상의 의무가 없다고 여겼다. 이후 1181년 비잔티움 공략에 나서 아드리아 해안(자라 포함) 북동부 스렘과 제문을 정복했다. 그 후 비잔티움은 내부 갈등에 점령되어 헝가리 정복에 대한 군사적 대응은 없었다. 1182년 벨라 3세는 비잔틴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공격 자체는 상당히 어설프게 진행되었고, 두 요새 모두 마노엘 황제, 알렉시우스 브라나스, 안드로니코스 라파르다스 시대부터 경험 많은 군사 지도자들이 방어하였다.

1180년 황제 마누엘 1세가 사망할 당시 비잔틴 제국.

1180년 마누엘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미망인인 안티오키아의 라틴 공주 마리아가 그녀의 어린 아들 알렉시오스 2세 콤네노스의 섭정 역할을 했다. 그녀의 섭정은 라틴 상인들에게 보여지는 편애로 악명이 높았고 1182년 4월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는 대중의 지지의 물결로 이 도시에 들어왔다. 거의 즉시, 그 축하 행사는 라틴의 대학살로 흘러갔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추방은 네마냐를 비잔틴 황제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스테판 네마냐는 헝가리 왕 벨라 3세와 연합하여 1183년 비잔티움에게 대공격을 가했다. 또한 비잔틴군의 지휘관인 니슈와 브라니체보의 안드로니쿠스 람파르디스도 새로운 중앙당국에 대한 복종을 포기했다. 동시에 헝가리 왕 벨라 3세가 비잔틴 베오그라드니슈, 세르디카(소피아)를 정복했다. 비잔틴 역사학자 니케타스 초나테스에 따르면 네마냐가 이끄는 세르비아인들이 이 캠페인에 동참했다. 이듬해 네마냐가 아드리아 남동부 해안에 공세를 펴 비잔틴 스카다르를 정복하고 두브로브니크(라구사)를 포위했다.

1185년 안드로니쿠스 1세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살해되고 새로운 비잔틴 황제 아이작 2세 안젤로스가 헝가리 국왕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평화 조약은 이삭 2세 황제가 벨라의 마가렛과 결혼할 수 있도록 했다. 헝가리군은 발칸 반도의 비잔틴 중심부에서 철수하여 네마냐를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네마냐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동시에 노르만족불가리아인들이 반비잔틴 동맹에 가담했다.

네만자는 두브로브니크(라구사)에게 비잔티움을 노르만 지배로 대체하도록 강요했다. 시칠리아 윌리엄 2세의 노르만인 역시 1185년 비잔틴 뒤르레스테살로니키를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에 나섰으나 대규모 약탈로 기강을 잃었기 때문에 비잔틴인들은 로어 스트루마 근방의 데메트리츠 전투에서 쉽게 그들을 격파하였다. 1185년 10월 불가리아 북부 로어 다뉴브에서 피터이반 1세 아센 형제가 이끄는 봉기가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이삭 2세 황제가 그의 결혼식을 위해 모이도록 명령한 특별한 헌사였다. 1186년과 1187년 동안 네만자는 비잔티움에 대항하여 아센 형제들과 행동을 조정하였다.

두 황제 사이

코스타 만드로비치의 1189년 스테판 네마냐프레데릭 바르바로사(19세기)의 만남

한편 아유비드 술탄 살라딘은 1187년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중남서부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제3차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큰 소동이 벌어졌다. 1189년 독일 황제 프레데릭 1세 바르바로사가 이끄는 대규모 십자군 군대가 부다에서 베오그라드와 니시를 거쳐 아드리아노플과 콘스탄티노플까지 진군했다.

니슈에서는 스테판 네마냐의 신수도에서 1189년 7월 말 독일 황제와 대주판이 만났다. 이 회의에서 네마냐 대통령은 바르바로사에게 십자군들이 비잔티움과의 전쟁에 나갈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바르바로사는 비잔티움을 통해 자신의 군대가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싶어 외교적 방법으로 이 제안을 거절했다. 한 달 뒤, 큰 긴장감을 가지고 이 통로를 둘러싼 십자군과 비잔틴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십자군은 필리포폴리스아드리아노플을 포로로 잡고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마침내 1190년 2월 다르다넬스 호를 건널 때 합의가 이루어졌다. 불확실한 협상 중에 이삭 2세 황제는 십자군과 세르비아인의 새로운 우정이 자신에게 매우 어려웠다고 대답했다.

1190년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칼리카드누스 강에서 익사했다. 동시에 이삭 2세 안젤로스 황제가 세르비아인들을 상대로 징벌적 원정을 개시했고, 네마냐가 남모라바 전투에서 패했다. 사실 콘스탄티노플은 세르비아인들을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니시베오그라드로 가는 큰길을 되찾고 싶었고, 반항하는 세르비아인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서였다. 평화 조약은 대주판 스테판 네마냐의 중간 아들인 스테판 네만지치가 비잔틴 공주, 즉 비잔틴 황제의 조카와 결혼할 수 있도록 했다.

비잔티움으로 돌아가기

2021년 베오그라드 스테판 네마냐 기념물 23m(75피트)

결론에 이른 평화는 네마냐가 첫째 부칸이 아닌 세바스토크레이터라는 비잔틴 호칭과 비잔틴 공주 에우도키아 호를 아내로 받은 그의 둘째 아들 스테판에게 계승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1192년 11월, 베니스로 가는 도중, 아크레에서 비잔틴 코르푸를 거쳐 두브로브니크(그라구사) 근처의 작은 섬인 로크룸의 아드리아 해 남동쪽 해안까지, 리처드 1세는 평범한 기사나 순례자로 신분을 숨기고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영국의 이라는 것을 밝혔다. 헝가리 왕 벨라가 1193년 초에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이삭 2세는 자신의 부대의 철수를 요구했고, 전쟁으로 베를라를 위협했다. 동시에 도게 엔리코 단돌로는 헝가리 자라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195년 4월 스테판 네만지치의 장인 알렉시우스 3세 안젤루스(1195-1203)가 동생 이삭 2세를 타도하고 정권을 잡았다.

1196년 라스 성당 베드로와 바울 근처 주 의회에서는 스테판 네마냐가 세르비아의 대왕자가 된 그의 둘째 아들 스테판을 위해 왕위를 물러났다.[9] 큰아들 부칸을 제타, 트라부니자, 흐보스노, 토플리카를 맡겼다. 네만자는 노년에 중이 되어 시메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비잔티움, 아토스 산으로 갔고 그곳에서 막내아들 사바는 한동안 수도사로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비잔틴 황제로부터 버려진 힐란다르의 수도원을 재건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1198년 서역 전체에 성지 해방을 요구한 새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세르비아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고 부칸을 통해 로마로 돌려보내고자 했다. 부칸과 헝가리 왕 에메릭(1196-1204)은 스테판과 동맹을 맺고, 이후 세르비아에서 내전이 벌어진다. 스테판을 상대로 한 이 조치는 그가 로마 교황에게 보낸 서한에 선행되어 왕관을 요구했다. 1201년 스테펜은 비잔틴 부인을 추방하여 알렉시우스 3세 황제와의 동맹을 파기하였다. 에우도키아는 스테판의 형이자 라이벌인 부크에게 제타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이때 타도 황제 이삭 안젤로의 아들, 어린 알렉시우스 4세의 안젤로스는 서방의 동맹국들의 도움으로 삼촌 알렉시우스 3세를 타도할 구체적인 계획을 생각해냈다. 1202년 스테판은 코토르 시의 베네치아 귀족 총독을 임명했다. 에메릭은 스테판의 움직임을 그의 왕관에 대한 공개 공격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헝가리에서 전통적으로 이 지역에 있는 그녀만이 우선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테판은 분쟁으로 왕위를 잃고 1202년 불가리아-쿠만 왕자인 칼로얀에게 국외로 탈출해야 했다.

그 사이 새로 결성된 십자군 군대의 통제는 베네치아 도게 엔리코 단돌로에게 점령당했는데, 놀랍게도 제4차 십자군에서 교황 본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1202년 헝가리 자라를 먼저 공격했고, 그 후 1204년 4월 콘스탄티노플 십자군이 정복한 비잔티움까지 공격했다. 스테판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며 역공세로, 칼로얀 왕자의 도움으로 1204년 라스 왕위에 복귀하고, 부칸은 제타로 후퇴한다. 형제간의 싸움은 1205년에 중단되었고, 분쟁이 발발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관계가 성립되었다.

비잔티움이 사라짐으로써 얻는 가장 큰 이득은 베네치아가 있었는데, 베네치아는 아드리아뿐 아니라 지중해에서 동서양의 상품에 대한 주요 무역 중개자가 되었다(참고: 실크로드마르코 폴로). 그 이후 이 해안 도시의 황금시대는 물론 네만지치 왕조도 시작된다. 그의 아버지처럼 스테판 네만지치는 베니스와 좋은 관계를 맺었고, 이것이 결국 새로운 로마 교황 호노리오 3세의 왕관을 확보하게 되었다.

죽음과 유산

우로시 프레디치(Urosh Predich)의 미러스트림 성 시메온(1899년)

86세에 그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안 시메온은 베개용 돌을 들고 성모 호데트리아의 아이콘 앞에 매트에 올려 놓으라고 했다. 그는 1199년 2월 13일 아들 사바와 다른 승려들 앞에서 죽었다.[13][14][15][16] 그는 힐란다르 수도원 땅에 묻혔다. 그의 마지막 말은 사바가 "신이 허락할 때,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의 유해를 세르비아로 가져갈 것을 요구했다. 사바는 후에 네마냐의 영예로 성 시메온의 리투르기를 썼다.

1206년 사바는 아버지의 유해를 세르비아로 가져오기로 결정했는데, 세르비아에서는 형제 스테판과 부칸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재결합한 세르비아 땅을 찢어버렸다. 사바에 도착하자 그의 형제들은 화해를 하였고 시메온은 1207년 그의 개인 토대인 스터데니카 수도원에서 다시 봉안되었는데, 그의 새 무덤에서 성유(myrrh)가 스며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시메온에게 미르흐-스트리밍이라는 비유를 주었다. 그의 무덤에서 일어난 기적 때문에 세르비아 정교회는 그를 성찬했고, 2월 26일 그의 잔치일을 선포했다[O.S. 13 2월]. 성인의 숭배. 시메온은 세르비아의 국가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다. 그의 종교의 중심지는 스투데니카와 힐란다르의 수도원에 있다.[10]

이름 및 제목

스테판 1세와 라틴 스테파누스 네마니아 등 스테판 네마냐를 지칭하는 데 다양한 이름이 사용돼 왔다. 때때로 그의 이름의 철자가 성공적이어서 스테판 네마냐가 된다. 말년에 승려가 되어 시므온 스님, 즉 시므온 스님을 가리켰다. 사후 정교회에 의해 시성되어 성(聖)이 되었다. 몰약을 꿈꾸는 시므온. 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스테판은 그를 "조부들의 잃어버린 땅의 조각들, 그리고 그들의 Rejectider"라고 불렀다. 그의 다른 아들 사바는 그를 "우리의 주와 독재자, 세르비아 땅 전체의 통치자"라고 불렀다. 어떻게 보면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숭배를 소개하여 비잔티움에서 평행이 없는 통치자의 이상적인 모습을 만들어냈다.[17]

가족

네마냐는 아나라는 이름으로 세르비아 귀족과 결혼했다. 그들에게는 아들 셋과 딸 셋이 있었다.

파운데이션

스테판 네마냐가 여러 수도원을 설립, 복원, 재건했다. 그는 또한 1170년부터 1300년까지 이르는 라슈카 건축학교를 설립했다.

스투데니카와 이바르 강이 합류하는 곳에 있는 테오토코스스투데니카 수도원 교회 도르미션. 이것은 1186년경 아드리아 해안에서 온 최고의 석공들이 지은 네만자 기증품이다. 프레스코화는 1208년경 그리스 최고의 명인들이 그렸다.

재구성

기부

참고 항목

참조

  1. ^ 드보르닉 1962 페이지 91-94.
  2. ^ 좋아, 1994 페이지 2-9, 15, 19-20, 38-41
  3. ^ 스티븐슨 2000, 267-268, 299-301.
  4. ^ 치르코비치 2004년 31-36페이지.
  5. ^ 커타 2006, 페이지 333-339, 389-392.
  6. ^ 커타 2019, 페이지 658-663.
  7. ^ 좋아, 1994 페이지 38-41.
  8. ^ 치르코비치 2004, 페이지 33.
  9. ^ a b 칼리치 2017, 페이지 12-13.
  10. ^ a b 치르코비치, 코라치 & 바비치 1986, 페이지 13.
  11. ^ 맑음 1994, 페이지 3.
  12. ^ 라스의 대천사 마이클의 동굴 라브라 (Danica Popovich, Marko Popovich, 1999)
  13. ^ 좋아, 1994 페이지 38-39.
  14. ^ 치르코비치 2004년 33쪽 35쪽
  15. ^ 커타 2006, 페이지 389.
  16. ^ 커타 2019, 페이지 497, 515, 662.
  17. ^ 커타 2006, 페이지 390.
  18. ^ 폴미스 1968, 페이지 90.

원천

외부 링크

스테판 네마냐
출생: 1114년 사망: 1199년 2월 13일
섭정 직함
선행자 세르비아대공
1166–1196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