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이그 전투
Battle of the Puig![]() |
엘 푸이그 드 산타 마리아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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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콘키스타(아랍의 발렌시아 정복)의 일부 | |||||||
![]() 안드레스 마르잘 드 사스의 푸이그 드 산타 마리아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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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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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과 지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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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 |||||||
기사 50명과 보병[1] 1,000명 | 600 기병 보병 1만1000명 |
1237년의 푸이그 전투(Puig de Santa Maria 전투), 푸이그 드 에네사 전투(Puig de Enesa 전투), 또는 푸이그 드 세폴라 전투(Puig de Cepolla 전투)는 이베리아 레콘퀴스타 전투와 아라곤스 정복 발렌시아의 전투였다.
이 전투는 1237년 8월, 자얀 이븐 마르다니쉬의 지휘 아래, 베르나트 기욤 1세 덴텐사(Bernat Guilem I'D'Entensa)의 지휘 아래, 발렌시아의 타이파(Taifa)의 군대에 대항하여 아라곤 왕관의 군대를 공격하면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아라곤의 왕관에 의한 아라곤의 결정적인 승리와 발렌시아의 정복으로 귀결되었다.
컨텍스트
알모하데스인들은 북아프리카의 에미레이트 항공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의 에미레이트 항공을 다소 불안정한 정치적 실체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발란시아의 알모하드 총독, 자이드 아부 압드 알라 무함마드, 자이드 아부 자이드는 왕권 칭호를 부여하는 등 완전한 자율성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결코 알모하드 칼리프하이트나 황제에게 충성을 포기하거나 돈을 만들어 이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알모하드가 라스나바스 드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제국은 타이파스라고 불리는 작은 왕국에서 분열되고 해체되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라나다 나스리드 왕국이나 그라나다 에미리트, 튀니지의 하프시드 타이파, 알제리의 바누 지안 타이파, 그리고 마리니드가 모로코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1224년 아라곤의 제임스 1세는 아라곤과 카탈로니아에서 온 귀족들에게 무슬림 지배를 받는 발란시아의 정복을 개시할 것을 요청하여 테루엘을 통해 이 지역으로 들어갔다. 자이드 아부 자이드는 발란시아와 무르시야로부터 수입의 5분의 1을 받는 대가로 아라곤 왕에게 즉시 휴전을 요청했다. 1225년 여름, 제임스 1세는 그 성을 포위함으로써 페니콜라에 성을 빼앗으려 했다. 아라곤의 귀족들이 포위를 포기했기 때문에 그 포위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1228년까지 이븐 허드가 이끄는 원주민 발렌시아-무슬림 반란은 마디나 무르시야 시를 점령하고 오리후엘라, 데니아, 간디아, 자티바, 알-야지라트 수쿼리의 지역을 장악할 만큼 충분한 지지를 얻었다. 반란은 카스티야 왕국의 구호군의 위협 때문에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발렌시야 자체를 더욱 포위했다. 이븐 허드는 발렌시야를 데려가지 않고 마디나 무르시야로 은퇴했다.
기독교 왕과 아부 자이드의 조약으로 인해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아부 알 하지의 손자 자이얀 이븐 마르다니쉬를 지지하여 충성을 바꾸게 되었다. 아부 자이드는 발렌시아를 탈출하여 북쪽으로 향했고, 자이얀은 1229년 겨울 왕임을 선언하지 않고 의기양양하게 이 도시로 들어갔다. 마디나 무르시야로부터 아니트-알모하드 반군 이븐 허드는 발렌시아를 포위하여 자이얀에게 도시를 버리라고 압박했다.
1229년 최근 마요르카를 정복한 아라곤의 제임스 1세는 다시 한번 발렌시아의 타이파 정복에 도전하기로 했다.
발렌시아 전역
1235년 아라곤 왕관이 발란시아 주변 알발랏과 쿨레라 일대에서 공격을 하고 있었으나 기독교군은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1235년 6월 25일 아라곤의 제임스 1세는 발란시아 외곽의 포이오스에서 성을 포위했다. 남쪽으로 물러난 자이얀 이븐 마디니쉬를 위해 싸우는 무슬림들은 엘 푸이그의 요새를 파괴했다.
제임스 1세는 테루엘에서 퇴위한 에미르 아부 자이드를 만나 그들 사이에 새로운 협정을 맺었다. 이 문서에는 그의 서명 대신 아부 자이드의 볏과 독수리, 카스티야의 모토가 찍혀 있었다. 시엘로 데 세이트 부체트 니에토 데 [에미르 알] 모메닌. 날짜는 1236년 5월 28일로 정했으며, 발렌시아 영토의 4분의 1은 정복 시 아부 자이드로 가고, 아부 자이드와 그의 후손들은 제임스 1세의 신하와 헝가리의 비올란트와 함께 낳은 모든 아이들의 신하를 스스로 선언하도록 규정하였다. 아부 자이드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비센스 벨비스라는 이름을 채택한 것은 이때였다. 그는 마리아 페란디아라는 이름의 사라고사 출신의 여성과 결혼했다. 일부 소식통들은 "도밍가 로페즈"[citation needed] 하나를 잘못 인용한다.
1236년의 문서에서는 카탈로니아군과 아라곤군은 이미 발렌시야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1236년 10월 13일 몬손의 코호트는 정복을 시도했다.[2] 제임스 1세는 레리다에서 발행된 10월 28일자 문서에서 발렌시아 시가 정복되면 "큐리아 콰미 콘보카비무스의 몬테소눔(Montesonum in curia generali quam convocavimus pro fasienda operattractra mauros)"라며 교회에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날 그는 도시의 중앙 모스크를 가톨릭 교회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11월 13일 제임스 1세는 일단 도시가 함락되면 발렌시아 교회는 타라고나 시(See of Tarragona)의 종속자가 된다는 내용의 포고령을 발표했다. 정복 후 발렌시아인의 생활을 더욱 준비하면서, 제임스 1세는 사원의 지방 사부에게 그 영토에서 화폐를 주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라고 결의했다.
팔랑키아에서의 캠페인
부르리아나 공성전과 컬레라 공성 이후 아라곤의 제임스 1세는 발렌시아주로의 마지막 밀고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1236년 10월 28일 몬손에 병력을 집결시켜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승인을 얻어 1237년 2월 2일 정복을 교황불의 명령에 의한 공식 십자군이라고 명명했다. 1236년 말부터 1237년 초까지 몽펠리에에서 진을 친 후, 군대는 테루엘에 집중하여 팔랑시아 강을 따라 라발두이소(La Vall d'Uixo), 쥘리(Nules), 알메나라(Almenara)를 점령하였다.[3] 그들은 더 나아가 1237년 6월 25일에 베테라, 파테르나, 몬카다, 그리고 마침내 발렌시야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엘 푸이그 성읍을 점령했다.
아라곤 세력은 엘 푸이그의 요새를 재건하여 바다까지 뻗은 진흙과 돌로 된 벽을 쌓았다. 두 달이 지나자 방어작전은 준비되었고 성은 100명의 기사와 왕의 친척인 베르나트 기욤 1세가 지휘하는 많은 농민들이 점령했다.
이슬람 역사학자 이븐 칼둔에 따르면, 9월 16일부터 1236년 9월 4일까지(역시간여행) 기독교인들은 사라센족을 공격해 7개의 진을 구축했고, 이 중 2개는 발란시아, 알 야지라트 수쿼리, 사티바에 집중됐다. 카스티야 군대가 카스티야 왕의 지휘를 받아 코르도바 시를 점령한 반면, 제임스 1세는 그의 작전 지역에서 카스티야인들의 대다수를 장악했다. 발란시야 포위작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에네사에 성을 쌓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투
자이얀 이븐 마르다니쉬는 사티바와 주카르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엘 푸이그 쪽으로 진격했다. 제임스 1세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의 병력은 600여 기병부대와 1만1000여 명의 농민 또는 보병이었다.[4] 그는 1237년 8월 15일 아라곤 군대를 공격했다. 이슬람 역사학자 아흐메드 모하메드 알 마카리에 따르면 이번 공격은 제임스 1세가 엘 푸이그를 떠나 후세카를 떠난 직후 발생했다.
발렌시아를 주재할 때 아부 자이드의 비서였던 이븐 알 압바는 아비 자이드가 도시를 떠난 후 자이얀의 서기가 되었다. 그는 그 전투가 정오경에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자이얀 휘하의 무슬림 알모하드 군대는 대패했고, 그들의 많은 병사들은 그 행동에서 살해당했다. 알모하드 전사자 중에는 전도사 아부레비이 이븐 살림 엘콜라리가 "현명한 사람"이었다. 승리의 소식이 아라곤의 제임스 1세에게 전해지자 그는 전투 현장으로 이동하여 며칠을 머물다가 그 후 아라곤으로 돌아왔다.
이 결정적인 아라곤의 승리는 발렌시아의 지배권을 위한 전체적인 싸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투가 끝난 뒤 이 지역의 기독교 세력이 불어나면서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남쪽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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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인 |
결과들
아라곤의 제임스 1세가 엘 푸이그의 아라곤 군 사령관인 아라곤에 있는 동안 베르나트 기욤 1세 디엔텐사(Bernat Guilem I'D'Entensa)는 이 행동 중에 받은 상처로 사망했다. 이것은 귀족들, 특히 아라곤의 귀족들을 크게 낙담시켰다.
알라고니아의 블라스코 1세는 다른 많은 바론들을 대표하여 연설하면서 엘 푸이그를 대피시키고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벌어들인 이익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임스 1세는 귀족들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캠페인을 계속했다. 왕은 1238년 1월 24일 다시 엘 푸이그 드 산타 마리아로 돌아와 당시 10~11세 정도였던 베르나트 기욤 드 엔텐사(Bernat Guillem d'Entensa)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 참석한 모든 귀족들과 군령들의 대표들 앞에서 왕은 기욤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고 그를 아버지의 모든 작위와 땅의 후계자로 선언했다. 그는 또 임시로 베렌게르 드 엔텐자를 성의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국왕의 몸짓은 선거 운동 지속에 대한 반대를 멈추게 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반대로 일단 왕이 가는 것을 알고 나면 푸이그의 수비대 상당수는 비밀리에 만나 자리를 버리기로 동의했다. 수비대에 거주하던 도미니카 연방교도 중 한 명이 국왕에 대한 음모를 비난했다. 다음 날, 그는 승리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하고 그곳에 있는 성 귀족들에게 설교를 했다.
일단 푸이그로 돌아온 제임스 1세는 자이얀으로부터 투리아 강에서 토토사와 테루엘까지 모든 성을 바치고, 사이다 지방의 왕을 위한 호화로운 궁전을 짓고, 수도에 대한 제임스의 공격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매년 만 베스를 지불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아라곤의 제임스 1세는 그 제의에 대해 상황이 바뀐 점을 들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정복을 진행하였다.
참조
- ^ Hernàndez, Francesc Xavier (2004). "Les Grans Conquestes". Història Militar de Catalunya. Vol. II: Temps de Conquesta (Segunda edición ed.). Rafael Dalmau Editor. p. 102. ISBN 84-232-0655-6.
- ^ Varios autores. "La formación de los Países Catalanes (siglos XIII-XIV)". Historia medieval de Cataluña (1 (2nd Impression) ed.). Universidad Abierta de Cataluña. p. 99. ISBN 84-9788-170-2.
- ^ LA 엔시클로페디아, 알메나라
- ^ Jaime I el Conquistador (1557). "chap. LX". Chronica, o commentari del gloriosissim e invictissim Rey en Iacme. www.cervantesvirtual.com. Viuda de Joan Mey Flandro. pp. f. LXII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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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목록
- Rovira i Virgili, Antoni; Antoni Rovira i Virgili (1920). Historia Nacional de Cataluña, vol. IV. Ediciones Patria. pp. 563 a 566.
- Jaime I el Conquistador; Jaime I el Conquistador (1557). Chronica, o commentari del gloriosissim e invictissim Rey en Iacme. Viuda de Joan Mey Fland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