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불가리아 전쟁(913년 ~ 927년)
Byzantine–Bulgarian war of 913–927비잔티움-불가리아 전쟁(913년 ~ 92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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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불가리아 전쟁의 일부 불가리아-세르비아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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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igerents | |||||||
불가리아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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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927년 비잔티움-불가리아 전쟁 (불가리아어: б ългаро – византийска война от 913–927)은 불가리아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 사이에 10년 이상 동안 싸웠습니다. 비잔티움 황제 알렉산드르가 불가리아에 대한 연례 조공을 중단하기로 한 결정으로 인해 전쟁이 촉발되었지만, 군사적, 이념적 주도권은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에 의해 잡혔습니다. 시메온 1세는 차르로 인정받기를 요구하고 콘스탄티노플뿐만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의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917년, 불가리아 군대는 아켈로스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에게 대패를 당했고, 그 결과 발칸 반도에서 불가리아는 완전한 군사적 우위를 점했습니다. 불가리아는 917년 카타시르타이, 921년 페개, 92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시 비잔티움을 물리쳤습니다. 불가리아인들은 또한 트라키아의 중요한 도시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하고 그리스 남부 깊숙한 곳에 있는 헬라스 테마의 수도 테베를 점령했습니다. 아켈로스의 재앙 이후 비잔티움 외교는 세르비아 공국이 불가리아를 서쪽에서 공격하도록 선동했지만, 이 공격은 쉽게 진압되었습니다. 924년 세르비아인들은 세르비아로 가는 길에 소규모 불가리아 군대를 매복 공격하여 패배시켰고, 이는 그해 말 불가리아의 세르비아 병합으로 끝난 대규모 보복전을 촉발시켰습니다.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해군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922년 마디아에 있는 파티미드 칼리프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 빌라에게 사절을 보내 강력한 아랍 해군의 지원을 협상했습니다. 칼리프는 동맹을 맺기 위해 자신의 대표자들을 불가리아로 보내기로 동의했지만, 그의 사절들은 칼라브리아 해안 근처에서 비잔티움 제국에게 붙잡혔습니다.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 황제는 아랍인들에게 푸짐한 선물을 퍼부음으로써 불가리아와 아랍의 동맹을 가까스로 피했습니다. 927년 5월 그가 사망할 무렵 시메온은 발칸 반도의 거의 모든 비잔티움 제국의 소유권을 장악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927년, 두 나라 모두 인구와 경제에 큰 타격을 준 엄청난 군사적 노력으로 지쳤습니다. 시메온의 후임자인 피터는 우호적인 평화 조약을 협상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그를 불가리아의 황제로 인정하고 불가리아 정교회를 독립 총대주교청으로 인정하고 매년 헌화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평화는 피터와 로마노스의 손녀 아이린 레카펜의 결혼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이 합의는 불가리아와 비잔티움 제국 모두에게 안정과 번영의 시기인 양국 간의 40년의 평화적인 관계를 이끌어냈습니다.
전주곡
정치적 배경
시메온은 893년 즉위 후 첫 해에 성공적으로 불가리아의 상업적 이익을 방어하고 흑해와 스트란차 산맥 사이의 영토를 획득했으며 894-896년 비잔티움-불가리아 전쟁의 결과로 비잔티움 제국에 매년 공물을 바쳤습니다.[1][2] 전쟁의 결과는 발칸 반도에서 불가리아의 지배를 확인시켜 [3]주었지만, 시메온은 자신을 위한 제국의 칭호를 주장하고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왕위를 차지하는 그의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문화적, 이념적 기반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4] 그는 불가리아의 새로운 수도인 프레슬라프에서 야심찬 건설 계획을 실행하여 이 도시가 비잔틴 수도의 화려함에 필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3][5][6] 시메온은 아버지 보리스 1세(재위 852–889)의 불가리아 문화 정착과 보급 정책을 계속하여 이 나라를 슬라브 유럽의 문학과 정신적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보리스 1세 아래 설립된 프레슬라프와 문학 학교들은 그의 후계자 통치 기간 동안 그들의 전성기에 이르렀습니다.[7][8] 키릴 문자가 발명된 것은 바로 이 시기인데, 아마도 불가리아 학자 오흐리드의 클레멘스에 의해 발명되었을 것입니다.[9]
894년-896년 전쟁 동안 북동쪽 지역의 마자르 파괴는 비잔티움 외교의 영향으로 외세의 개입에 대한 불가리아 국경의 취약성을 노출시켰습니다.[3] 비잔티움과의 평화가 체결되자마자 시메온은 발칸 반도 서부에서 불가리아의 위치를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세르비아 왕자 무티미르(재위 850–891)가 죽은 후, 지배 왕조의 몇몇 구성원들은 892년에 페타르 고즈니코비치가 왕자로 자리매김할 때까지 세르비아[10] 공국의 왕위를 놓고 싸웠습니다. 897년 시메온은 페타르를 인정하고 그를 그의 보호 아래 두기로 합의하여 20년 동안 서부에 평화와 안정의 기간을 가져왔습니다.[10] 그러나 페타르는 자신의 종속적인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을 위한 방법을 모색했습니다.[10]
시메온은 10세기 초 비잔티움 제국의 내부 상황을 나약함의 표시로 여겼습니다.[11] 903년에 현명한 황제 레오 6세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905년에 동방 군대의 사령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반란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에쿠메니칼 총대주교 니콜라스 미스티코스와 그의 정부 조 카르보놉시나와의 네 번째 결혼을 놓고 불화를 빚으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907년 레오 6세는 총대주교를 폐위시켰습니다.[11][12]
904년의 위기
10세기 초, 아랍인들은 시칠리아 정복을 완료했고 902년부터 에게 해의 비잔틴 해운과 마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904년, 그들은 제국의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테살로니카를 약탈했고, 2만 2천 명의 포로를 잡아들여 사실상 도시를 비워두었습니다.[13][14] 시메온은 그 기회를 이용하기로 결심했고, 불가리아 군대가 인적이 드문 도시 근처에 나타났습니다. 불가리아인들은 테살로니카를 확보하고 정착시킴으로써 에게 해의 중요한 항구를 확보하고 발칸 반도 서부에서 그들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영구적인 위협을 가했을 것입니다.[11][15] 비잔티움 제국은 그 위험을 인식하고 경험 많은 외교관 레오 초이스파크테스를 보내 해결책을 협상했습니다. 협상의 진행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 현명한 황제 레오 6세에게 보낸 남아있는 편지에서 초이스파크테스는 불가리아인들에게 도시를 차지하지 말라고 "확신"했다고 자랑했지만 더 자세한 사항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11] 그러나 나라시 마을 근처에서 발견된 한 비문은 904년 이후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이 테살로니카의 북쪽까지 20킬로미터(12마일) 밖에 되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a] 협상의 결과로 불가리아는 칸 프레시안 1세 (재위 836–852)의 통치 기간 동안 마케도니아에서 획득한 영토를 확보하고 영토를 더 남쪽으로 확장하여 이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4][11][13] 비잔티움-불가리아 국경의 서쪽 부분은 팔라크로 산에서 세레스 마을을 거쳐, 비잔티움 쪽에 놓여진 다음,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라시로 향했고, 오늘날의 악시오호리 마을에서 바르다르 강을 건너, 파이코 산을 지나, 에데사 동쪽을 지나 베르미오 산맥과 아스키오 산맥을 지나, 불가리아에 위치한 코스투르 마을에서 남쪽으로 할리악몬 강을 건너 그라모스 산맥을 관통한 다음 아오에스 강을 따라 드리노 강과 합류할 때까지 계속해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히마르 ë 마을에서 아드리아해에 이르렀습니다.
전쟁의 시작과 시메온 1세의 대관식
912년 레오 6세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 알렉산데르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알렉산데르는 레오 6세의 많은 정책들을 뒤집고 니콜라스 미스티코스를 총대주교로 복귀시켰습니다.[18] 당시의 외교 규약대로 시메온은 912년 말 또는 913년 초에 사절을 보내 평화를 확인했습니다. 비잔티움의 연대기 작가 테오파네스 콘티나투스에 따르면, 시메온은 그에게 "평화를 존중하고 친절하게 대한다면, 레오 황제의 통치 하에서 평화를 지킬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광기와 어리석음에 압도되어 사절들을 무시하고 시메온에게 위협을 가했고, 그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평화는 깨졌고 시메온은 기독교인들에게 맞서 무기를 들기로 결심했습니다."[19][20] 황제권을 주장하기 위해 카수스 벨리를 찾던 불가리아 통치자는 전쟁을 할 기회를 잡았습니다.[21][22] 그의 전임자들과 달리, 시메온의 궁극적인 야망은 로마 황제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왕위를 차지하고 불가리아-로마 공동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23] 역사학자 존 파인은 비잔티움의 왕위에 인기가 없고 경험이 없으며 알코올에 중독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남자가 있고 그의 후계자 콘스탄티누스 7세가 병든 어린 소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알렉산드로스의 도발적인 정책은 시메온의 결정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b][22][24] 불가리아가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913년 6월 6일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총대주교 미스티코스의 섭정하에 있는 나이가 적은 황제와 함께 혼란에 빠졌습니다.[22]
섭정의 첫 단계는 시메온의 공격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니컬러스 미스티코스는 시메온의 지혜를 높이 평가하는 한편, 시메온이 자신을 모욕하려는 행위를 하지 않은 "고아"(즉 콘스탄티누스 7세)를 공격했다고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21][25] 913년 7월 말경 불가리아의 군주는 대군을 지휘하는 작전을 시작했고, 8월에는 반대 없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모험의 수장 테오도르 다프노파테스는 15년 후에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에 살았던 사람들조차 느낄 수 있는 지진이 있었다"[26]고 캠페인에 대해 썼습니다. 불가리아인들은 도시를 포위하고 마르마라해의 황금 뿔에서 금문까지 도랑을 건설했습니다.[27][28]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에서 공부했고, 해상 지원 없이는 이 도시가 육지 공격에 난공불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은 도시를 공격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힘의 과시였습니다. 곧 포위가 풀리고 카반(제1장관) 시어도어 시그릿사는 평화를 제공하기 위해 보내졌습니다.[29] 시메온은 불가리아의 황제로 즉위하고, 그의 딸을 콘스탄티누스 7세와 사이에 두고, 따라서 아버지이자 어린 황제의 후견인이 되는 두 가지 요구가 있었습니다.[29][30][31]
테오도르 시그리차와 섭정 간의 협상이 끝난 후, 시메온의 두 아들을 위한 잔치가 블라허네 궁전에서 콘스탄티누스 7세가 직접 주재했습니다. 총대주교 니콜라스 미스티코스는 수행원들 가운데 불가리아 통치자를 만나기 위해 불가리아 진영으로 갔습니다.[23][32] 시메온은 총대주교 앞에 엎드렸고, 총대주교는 시메온의 머리 위에 황제관 대신 자신의 총대주교관을 씌웠습니다.[23][27][29] 시메온에게 적대적이었던 비잔티움 연대기는 그 의식을 엉터리로 발표했지만, 존 파인, 마크 휘토우, 조지 오스트로고르스키와 같은 현대 역사가들은 시메온이 너무 경험이 많아서 속을 수 없었고, 그가 정말로 불가리아의 황제(불가리아어로 차르)로 등극했다고 주장합니다.[33][34] 소식통에 따르면 니콜라스 미스티코스도 시메온의 두 번째 조건에 동의했으며, 이는 시메온이 로마의 공동 황제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23][31][35] 그의 목적을 달성한 시메온은 그와 그의 아들들이 많은 선물을 받고 영광을 얻은 후에 의기양양하게 프레슬라프로 돌아갔습니다.[27][29][36] 이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시메온은 도장을 바꿔 "시메온, 평화를 만드는 황제여, 당신이 여러 해 동안 통치하기를"이라고 썼습니다.[35]
아켈로스 전투
913년 8월에 체결된 협정은 단명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두 달 후, 콘스탄티누스 7세의 어머니 조에 카르보놉시나는 망명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914년 2월 그녀는 궁전 쿠데타로 니콜라스 미스티코스의 섭정을 무너뜨렸습니다. 미스티코스는 마지못해 총대주교직을 유지한 그녀를 황후로 선포했습니다.[27][37] 그녀의 첫 번째 명령은 섭정이 불가리아 군주에게 내준 모든 양보를 취소하여 군사적 보복을 유발하는 것이었습니다.[31] 914년 여름, 불가리아 군대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라는 테마를 침공했습니다. 동시에 불가리아군은 서쪽의 디르라키움과 테살로니카 지역으로 침투했습니다.[38] 트라키아의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인 아드리아노플은 9월에 포위되어 함락되었고, 지역 주민들은 시메온을 지배자로 인정했습니다.[39][40]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즉시 막대한 몸값을 받고 도시를 되찾았습니다.[37][41]
불가리아의 위협에 영구히 대처하기 위해, 비잔티움 제국은 동쪽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과의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고, 광범위한 반불가리아 연합을 창설하려고 했습니다. 917년 6월,[42] 두 명의 사절이 바그다드로 파견되어 칼리프 알 무크타디르와 평화를 얻었습니다. 디르하치움의 전략가인 레오 라브두코스는 불가리아의 봉신이었지만 불가리아의 종주권을 포기할 용의가 있는 세르비아 왕자 페타르 고즈니코비치와 협상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37] 그러나 불가리아의 충실한 동맹자 자후믈제의 미카엘 왕자로부터 협상에 대한 경고를 프레슬라프의 궁정은 받았고, 시메온은 세르비아의 즉각적인 공격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42][43][44] 비잔티움 제국의 마자르족 접근 시도 역시 불가리아 외교에 의해 성공적으로 맞섰습니다.[42] 장군 존 보가스는 불가리아 북동쪽의 스텝 지대에 거주하는 페체네그족에게 풍부한 선물과 함께 보내졌습니다. 불가리아인들은 이미 결혼을 포함하여 페체네그족과 강력한 관계를 맺었고,[43] 보가스의 임무는 어려운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는 몇몇 부족들에게 원조를 보내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비잔티움 해군은 보가스와 야심 찬 제독 로마노스 레카페노스 사이의 질투 때문에 다뉴브강 남쪽으로 그들을 수송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45][46]
...그리고 지금도 로마군의 도망친 군대가 치욕적으로 살해된 안키알루스에 뼈가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from Leo the Deacon's History, 75 years after the battle of Achelous.[47]
비잔티움 제국은 어쩔 수 없이 홀로 싸울 수밖에 없었지만, 아랍인들과의 평화로 인해 소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포함한 그들의 군대 전체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 병력들은 장로 레오 포카스 학파의 지휘 하에 배치되었습니다.[43][48] 병사들은 전투에 나서기 전에 "생명을 주는 십자가"에게 절을 하고 서로를 위해 죽을 것을 맹세했습니다.[49] 시메온은 서쪽과 북쪽 경계를 확보한 상태에서 대규모의 호스트를 소집할 수 있었습니다. 917년 8월 20일, 두 군대는 안키알루스 근처의 아켈루스 강 근처에서 격돌했습니다.[43] 처음에 비잔티움 제국은 성공했고 불가리아는 질서정연한 퇴각을 시작했지만 레오 포카스가 말을 잃자 비잔티움 군대 사이에 혼란이 확산되었는데, 연대기 편찬자 존 스카이리츠에 따르면 비잔티움 군대의 사기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인근 고지에서 전장을 감시하던 시메온은 반격을 명령하고 직접 불가리아 기병대를 이끌었습니다.[50][51][52] 비잔티움 제국의 계급은 무너졌고 테오파네스 콘티누아투스의 말에 따르면 "수세기 동안 일어난 적이 없는 유혈사태가 발생했습니다.[53] 거의 비잔티움 군대 전체가 전멸되었고 레오 포카스를 포함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메스셈브리아 항구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안전하게 도망쳤습니다.[44][54]
다시 한번 니콜라스 미스티코스는 불가리아의 맹공격을 막기 위해 소환되었습니다. 총대주교는 시메온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잔티움 공격의 목적은 불가리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시메온이 테살로니카와 디르라키움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비잔티움의 침략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훌륭한 기독교인으로서 시메온은 그의 동료 기독교인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간청했습니다.[55][56] 니콜라스 미스티코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불가리아 군대는 비잔티움 영토 깊숙이 침투했습니다. 레오 포카스는 또 다른 숙주를 모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바로 외곽의 카타시르타이 전투에서 야간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습니다.[44][57]
세르비아계 반대 운동
917년의 승리로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시메온은 비잔티움의 반불가리아 연합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세르비아 왕자 페타르 고즈니코비치를 상대해야 했습니다. 카반 테오도르 시그리차와 장군 마르마이스의 지휘 아래 군대가 파견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페타르 고즈니코비치를 설득하여 그들을 만나게 하고, 그들은 그를 붙잡아 프레슬라프로 보내 감옥에서 죽였습니다.[44][55][58] 불가리아인들은 페타르를 프레슬라프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무티미르 왕자의 손자인 파블레 브라노비치로 대체했습니다. 그래서 세르비아는 921년까지 꼭두각시 국가로 변했습니다.[55]
920년 비잔티움 제국은 세르비아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려고 무티미르의 손자인 자하리야 프리비슬라블예비치를 보내 파블레의 통치에 도전했습니다. 자하리자는 길을[55] 가던 불가리아인들에게 붙잡히거나 파블레에게 붙잡혔으며, 파블레는 [59]그를 시메온에게 알맞게 인도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자하리자는 결국 프레슬라프에 도착했습니다. 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제국은 파블레에게 많은 금을 바친 후 파블레에게 뇌물을 주어 편을 바꾸게 했습니다.[60] 이에 시메온은 921년에 자하리자가 이끄는 불가리아 군대를 보냈습니다. 불가리아의 개입은 성공적이었고, 파블레는 쉽게 폐위되었고, 불가리아인 후보가 다시 세르비아 왕위에 올랐습니다.[60][61] 이것은 자하리자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자랐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습니다.[60] 곧 자하리자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불가리아에 대한 적대를 시작했습니다. 923년[60][62] 또는 924년[61] 시메온은 테오도르 시그릿사와 마르마이스가 이끄는 소규모 군대를 보냈지만 매복 공격을 받고 전사했습니다. 자하리자는 그들의 머리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냈습니다.[60][63]
이 조치는 924년에 대대적인 보복전을 촉발시켰습니다. 불가리아의 대규모 병력이 파견되었고, 새로운 후보자인 차슬라프와 함께 그는 불가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62][63] 불가리아 사람들은 시골을 황폐하게 만들고 자하리자를 크로아티아 왕국으로 도망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가리아인들이 세르비아인에 대한 접근법을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차슬라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모든 세르비아 ž파를 불러들였고, 그들을 체포하여 프레슬라프로 데려갔습니다. 세르비아는 불가리아의 속주로 합병되어 크로아티아로 국경을 넓혔으며, 크로아티아는 국경을 넓혔습니다.[64] 세르비아는 신뢰할 수 없는 동맹국임이[64] 입증되었고 시메온은 전쟁, 뇌물 및 망명의 불가피한 패턴을 경계했기 때문에 합병은 필요한 조치였습니다.[65]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 (918–922)
917년 세르비아의 위협이 제거된 후, 시메온은 직접 헬라스 주제의 캠페인을 이끌었고 남쪽으로 깊숙이 침투하여 코린토스 지협에 도달했습니다.[55] 비록 많은 사람들이 에우보에아섬과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도망쳤지만, 불가리아 사람들은 많은 포로들을 잡아들였고, 국민들이 불가리아 국가에 세금을 내도록 강요했습니다.[66] 헬라스의 수도 테베는 함락되었고 요새는 파괴되었습니다.[66][67][68] 그 캠페인의 주목할 만한 에피소드는 11세기 작가 케카우메노스의 전쟁 전략에 관한 매뉴얼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시메온은 헬라스의[c] 인구가 많은 도시를 무위로 포위한 후, 용감하고 지략이 풍부한 병사들을 도시로 보내 방어의 약점을 찾아내고 계략을 썼습니다. 그들은 문들이 땅 위 높이 경첩 위에 올려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의 보고를 받은 시메온은 다섯 명을 도끼로 성 안으로 보내 경비병을 제거하고 경첩을 부수고 불가리아 군대를 위해 성문을 열었습니다. 문이 열린 후 불가리아 군대가 들어와 유혈사태 없이 도시를 점령했습니다.[69][70]
919년 봄, 로마노스 레카페노스 제독이 조 카르보놉시나를 수도원으로 강제로 돌려보내고 빠르게 명성을 날린 비잔티움 통치의 또 다른 변화를 촉발시켰습니다. 4월, 레카페노스의 딸 헬레나 레카페네는 콘스탄티누스 7세와 결혼했고, 레카페노스는 기본 조작자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9월에 레카페노스는 카이사르로 임명되었고, 12월에 그는 원로 황제로 즉위했습니다.[71] 시메온은 로마노스를 침략자로 간주하고 아르메니아 농민의[72] 아들이 자신이 원하는 위치를 차지한 것에 모욕감을 느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상황에 분노했습니다.[73] 그리하여 시메온은 로마노스와 왕조의 결혼을 통해 관계를 맺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레카페노스가 물러날 때까지 평화를 위한 협상을 거부했습니다.[68]
920년 가을, 불가리아 군대는 트라키아 깊숙한 곳까지 진군하여 다르다넬스 강에 도달하여 소아시아의 람파쿠스 시 바로 건너편 갈리폴리 반도 해안에 진을 설치했습니다.[59][61] 이러한 행동은 비잔티움 궁정에 큰 우려를 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불가리아인들이 갈리폴리와 람파쿠스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에게 해에서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74] 미스티코스 총대주교는 평화를 요구하기 위해 소송을 시도했고, 메셈브리아에서 시메온을 만날 것을 제안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59]
이듬해 불가리아인들은 콘스탄티노플 근처의 카타시르타이로 진군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오늘날 부르가스 근처의 아콰에 칼리대 마을로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불가리아인들을 그들의 수도에서 북쪽으로 유인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비잔티움의 지휘관 포토스 아르기로스는 몰레온의 아들 미카엘 휘하에 불가리아인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미카엘의 군대는 결국 불가리아군에 의해 발견되어 매복당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불가리아인들에게 상당한 사상자를 입혔지만, 그들은 패배했습니다. 미카엘은 부상을 입고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쳐 그곳에서 숨졌습니다.[59][75]
아콰에 칼리데 전투 이후, 메니코스와 카우카노스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이 추가로 남쪽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들은 스트란차 산맥을 넘어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시골을 황폐하게 만들고 황금 뿔 주변의 궁전들을 위협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포토스 아르기로스와 알렉시오스 모셀레 제독이 지휘하는 도시 수비대, 황실 수비대, 해군 수병 등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습니다.[76] 921년 3월, 비잔티움 제국이 대패한 페개 전투에서 반대 세력이 충돌했습니다. 포토스 아르기로스는 간신히 탈출했고 알렉시오스 모젤은 배에 오르려다 익사했습니다.[59][61] 922년 불가리아 사람들은 비지에 마을을 점령하고 비잔티움 수도 근처의 테오도라 황후의 궁전을 불태웠습니다. 로마노스는 삭티키오스 휘하에 군대를 보내 그들에게 대항하려 했습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보급품을 모으기 위해 흩어진 상태에서 삭티키오스는 불가리아 진영을 공격했습니다. 불가리아군이 재집결하여 공격 소식을 알렸을 때, 그들은 반격하여 비잔티움군을 격파하여 그들의 지휘관에게 치명상을 입혔습니다.[77]
불가리아-아랍 동맹 시도
922년까지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 전역을 지배했지만, 시메온의 주요 목표는 그의 손에 닿지 않았습니다. 불가리아 군주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해군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파티미드 칼리프국의 설립자이자 칼리프였던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 (재위 909–934)에게 눈을 돌리기로 결정했습니다.[59][78][79] 그는 북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지배했고 이탈리아 남부의 비잔틴 소유지에 지속적인 위협을 가했습니다. 비록 914년에 양측은 평화 조약을 맺었지만, 918년부터 파티마 왕조는 이탈리아 해안을 다시 공격했습니다.[79] 922년 불가리아인들은 그들의 동맹국 미카엘의 국가인 자클루미아를 통해 튀니지 해안에 있는 칼리프의 수도 알 마흐디야로 비밀리에 사절들을 보냈습니다.[60] 시메온 1세는 대규모 육상군과 아랍인에게 해군을 제공하는 불가리아군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모든 전리품은 똑같이 나누어지고, 불가리아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유지하고 파티마인들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의 비잔티움 영토를 얻을 것이라고 제안되었습니다.[79][80]
알 마흐디 빌라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자신의 사절단을 돌려보냈습니다.[60]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배는 칼라브리아 해안 근처에서 비잔티움 제국에 함락되었고, 양국의 사절들은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졌습니다.[60][81] 로마노스 1세가 비밀협상 사실을 알게 되자 불가리아인들은 투옥되었고, 아랍 사절들은 칼리프에게 줄 풍성한 선물을 가지고 알마흐디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시메온 1세를 능가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에 대사관을 파견했고, 결국 파티마 왕조는 불가리아를 지원하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82] 아랍인들과 동맹을 맺으려는 시메온 1세의 또 다른 시도는 역사학자 알 마수디에 의해 그의 책 황금의 초원과 보석 광산에서 기록되었습니다. 타말 알둘라피가 이끄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에서 온 아랍 원정대가 에게 해의 트라키아 해안에 상륙했고, 불가리아인들은 그들과 접촉을 맺고 타르수스에 사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번 시도 역시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62][63]
만년
아랍인들과 동맹을 맺지 못하자 923년[62][83] 또는 924년[63] 9월 시메온 1세는 다시 비잔티움 제국에 나타났습니다. 불가리아인들은 콘스탄티노플 외곽을 약탈했고, 성 교회를 불태웠습니다. 봄의 성모 마리아와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캠프를 차렸습니다. 시메온 1세는 세르비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일시적인 휴전을 하기 위해 로마노스 1세와의 회담을 요구했습니다.[83] 비잔티움 제국은 적대 행위를 중단하기를 열망하여 동의했습니다. 코스미디온 교외에서의 회담에 앞서 불가리아인들은 예방 조치를 취했고 특별히 준비된 연단을 주의 깊게 조사했습니다 – 그들은 한 세기 전인 813년 같은 장소에서 협상을 하던 중 실패한 비잔티움 제국의 칸 크룸 (재위 803–814) 암살 기도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84]
...시몬은 많은 부대로 나뉘어진 대군을 이끌고 도착했는데, 어떤 부대는 황금 방패와 황금 창으로 무장했고, 어떤 부대는 은 방패와 은 창으로 무장했고, 다른 부대는 모든 색깔의 팔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철로 덮여 있었습니다.
— Theophanes Continuatus on the Bulgarian army at Constantinople[85]
로마노스 1세가 먼저 도착했고, 시메온 1세는 그리스어로 "황제 시메온에게 영광을"을 외친 정예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말을 타고 나타났습니다.[83] 비잔티움 연대기에 따르면 두 군주가 키스를 한 후 로마노스 1세는 시메온 1세에게 불필요한 전쟁에서 기독교인의 피를 흘리지 말 것을 요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많은 피를 손에 묻힌 채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는지를 묻는 작은 설교를 나이든 불가리아 통치자에게 전했습니다. 시메온 저는 대답할 것이 없었습니다.[62][83] 그러나 역사학자 마크 위토우는 이 기록들은 사건 이후에 작성된 공식적인 비잔틴의 소원을 빌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합니다.[86]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유일한 암시는 회의가 끝나는 순간, 독수리 두 마리가 하늘 높이 나는 것이 목격되었고, 그들은 교전하여 즉시 헤어졌고, 한 마리는 북쪽으로 트라키아로 향했고, 다른 한 마리는 콘스탄티노플로 날아갔다는 우화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은 두 통치자의 운명을 나타내는 나쁜 징조로 여겨졌습니다.[83] 두 마리의 독수리의 징조는 로마노스와의 만남에서 시메온 1세의 황제 칭호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와 동등한 지위를 인정했다는 수사학적 함의입니다.[86] 그러나 로마노스 1세는 시메온 1세 생전에 이 협정을 비준한 적이 없었고, 양측의 모순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87] 비잔티움 황제는 925년의 서신에서 시메온 1세가 스스로를 "불가리아와 로마의 황제"라고 칭한 것을 비판하고 트라키아의 정복된 요새들의 반환을 요구했습니다.[88][89]
926년 불가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위해 그들의 후방을 확보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왕국을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습니다. 시메온 1세는 토미슬라프 왕(재위 910–928)이 비잔티움의 동맹국이었고 그의 적들을 보호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 국가를 위협으로 여겼습니다.[90] 불가리아군은 크로아티아 영토로 진군했지만 크로아티아군에게 완패했습니다.[91][92] 교황의 중재로 평화가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시메온 1세는 비잔티움의 수도를 공격할 준비를 계속했습니다. 불가리아군의 손실이 크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데, 크로아티아군과 싸우기 위해 전군의 극히 일부만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불가리아의 군주는 토미슬라프 왕이 평화를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해 보였습니다.[90] 그러나 그의 전임자 크룸과 마찬가지로 시메온 1세는 927년 5월 27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던 도중에 63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d][90]
평화 조약
시메온 1세는 그의 둘째 아들 표트르 1세 (재위 927–969)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베드로 1세의 치세 초기에, 궁정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그의 외삼촌인 조지 서수불이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젊은 군주의 섭정 역할을 했습니다.[93] 즉위하자마자, 피터 1세와 조지 서수불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그 때까지 불가리아인들에 의해 점령되었던 그 지역의 요새들을 공격하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94] 그 습격은 힘의 과시를 위한 것이었고, 힘의 입장에서 불가리아인들은 평화를 제안했습니다.[95][96][97] 양측은 예비 조건을 논의하기 위해 대표단을 메셈브리아에 보냈습니다. 협상은 최종 조항이 합의될 때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계속되었습니다. 927년 11월에 베드로 1세는 비잔티움의 수도에 도착했고 로마노스 1세에게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96] 블라허네 궁전에서 양측은 불가리아 군주와 로마노스 1세의 손녀 마리아 레카페네와의 결혼으로 봉인된 평화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그 때 마리아는 "평화"라는 뜻의 아이린으로 개명되었습니다.[97][98] 927년 10월 8일 피터 1세와 아이린은 성 교회에서 엄숙한 의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봄의 마리아 – 시메온 1세가 몇 년 전에 파괴하고 재건했던 바로 그 교회.[96]
조약의 조건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은 공식적으로 불가리아 군주의 제국 칭호를 인정했지만 불가리아 황제는 비잔티움 황제의 "영적인 아들"로 간주된다는 공식을 주장했습니다.[99] 그 문구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 통치자들의 칭호는 비잔틴 통치자들의 칭호와 맞먹었습니다.[95][96] 불가리아 정교회는 또한 독립적인 총대주교청으로 인정받았으며, 따라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총대주교청에 이어 다섯 번째로 자포자기적인 동방 정교회가 되었고, 최초의 국가 정교회가 되었습니다.[96] 이 조약은 또한 포로 교환과 비잔티움 제국이 불가리아 제국에 바칠 연례 조공을 규정했습니다.[97][99] 이 조약은 904년에 합의된 대로 국경을 회복시켰는데, 불가리아는 트라키아, 테살리아, 헬라스에서 시메온 1세가 정복한 대부분의 영토를 반환하고 마케도니아 대부분과 에피루스의 대부분을 확고한 지배권을 유지했습니다.[100] 그리하여 베드로 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아버지의 모든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97]
후폭풍
그의 통치 첫 몇 년 동안, 베드로 1세는 그의 세 형제 중 두 명인 928년 요한과 930년 미카엘에 의해 반란에 직면했지만, 둘 다 진압되었습니다.[101] 965년까지 그가 통치한 대부분의 기간 동안, 표트르 1세는 불가리아 국가의 황금기를 정치적으로 공고히 하고, 경제적으로 확장하고, 문화적인 활동을 하는 시기에 주재했습니다.[102][103] 동시대 불가리아 사제이자 작가인 코스마스 더 프리스트에 대한 논문은 부유하고 책을 소유하며 수도원을 건설하는 불가리아 엘리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프레슬라프, 코스투르 및 기타 지역에서 수집된 자료적 증거는 10세기 불가리아의 부유하고 정착한 그림을 암시합니다.[102][104] 농민들의 개인적 특권을 희생시키면서 지주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의 영향력이 크게 증가하여 사회의 마찰을 일으켰습니다.[105] 사제 코스마스는 불가리아의 수도원장들과 주교들이 그들의 무리들에 대한 탐욕, 식탐, 그리고 무시를 비난했습니다.[106] 베드로 1세의 치세 동안에 보고밀교가 생겨났습니다. 보고밀교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비잔티움 제국,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로 퍼져 나갔습니다. 카타르).[107] 불가리아 제국의 전략적 위치는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이 나라는 북서쪽으로는 마자르족, 북동쪽으로는 페체네그족, 그리고 북동쪽으로는 키에반루스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는 것, 그리고 남쪽으로는 비잔티움 제국과 같은 공격적인 이웃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104]
평화 조약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동쪽으로 쇠퇴하는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에 자원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재능 있는 장군 존 쿠르쿠아스의 지휘 아래, 비잔티움 제국은 무슬림들에 대한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는 비잔티움-아랍 전쟁의 진로를 뒤집었습니다.[108] 944년까지 그들은 유프라테스 중부의 아미다, 다라, 니시비스 도시들을 습격하여 에데사를 포위했습니다.[109] 963년에서 969년 사이에 황제로 통치했던 나이키포로스 포카스 아래에서 961년 크레타의 재점령과 소아시아의 일부 영토의 회복으로 놀라운 비잔틴 성공이 계속되었습니다.[110][111] 비잔티움의 자신감과 권력이 증가하자 나이키포로스 포카스는 965년 불가리아에 대한 연례 공물의 지불을 거부했습니다.[112][113] 이로 인해 968년부터 971년까지 루스의 불가리아 침공으로 인해 불가리아 국가가 일시적으로 붕괴되고 1018년 비잔티움 제국이 정복할 때까지 50년 동안의 비잔티움-불가리아 전쟁이 벌어졌습니다.[114]
참고 항목
각주
메모들
^a: 나라시 근처에서 발견된 국경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세계 6412가 창조된 해에 7[904]을 기소하십시오. 불가리아와 로마 사이의 국경. 시메온의 통치 기간 동안 불가리아의 왕자에 의해 올구타르칸 테오도르와 코미타 드리스트라가 통치했습니다."[11][115]
"퍼플-본"이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누스 7세는 레오 7세와 그의 네 번째 부인 조 카르보놉시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교회에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116]
^c: 케카우메노스의 스트래티지콘에는 [117]도시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d: 시메온 1세의 죽음에 대한 전설적인 원인이 몇몇 비잔티움 문헌에 나와 있습니다. 927년 5월, 요한이라는 점성가는 로마노스 1세 황제에게 콘스탄티누스 포럼에서 시메온 1세의 무생물 두 배인 서쪽을 바라보는 조각상이 있다고 알렸습니다. 그는 상의 머리를 제거하면 시메온 나는 죽게 된다고 황제에게 말했습니다. 로마노스 1세는 즉각 동상을 파괴하라고 명령했고 바로 그 시간에 불가리아의 노황제가 사망했습니다.[8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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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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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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